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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여강여호의 신화가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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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오면 공휴일? 행복한 나라 부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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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기행/정찬주 지음/유동영·아일선 사진/작가정신 펴냄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인연 1, 2』 등 불교와 밀접한 글쓰기를 해온 작가 정찬주. 그가 이번에는 부탄, 네팔, 남인도, 스리랑카, 중국 오대산까지 불국을 다녀온 경험과 기록을 담아 『불국기행』을 펴냈다. 이 책에는 세계문화유산인 보드나드 스투파, 더르바르 광장, 스와얌부나트 사원, 카샤파 왕궁터, 운강 석굴 등은 물론이고 그간 독자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디첸포드랑 승가학교, 파로종, 질루카 사원, 아소카 스투파, 까르마이 꾸탐 사원터, 갈비하라 사원, 나후사 등 주요 불교 유적이 문화적 맥락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오롯이 소개되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금언처럼 사전 지식이 있어야 여행하는 곳의 역사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다섯 나라로 떠날 여행자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전문적이거나 학술적인 서술 대신 기초적인 지식과 감흥 위주로 이 글을 썼다. 『불국기행』은 여행기이자 해당 나라에 대한 입문서로서 독자가 이들 역사와 문화를 미리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주목할 점은 저자가 불교 유적을 한 지역의 맥락 안에서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곳곳에서 우리 역사나 우리말과의 접점을 찾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부탄과 남인도 등지에서 저자는 우리말과의 그들 언어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한다. 네팔의 아소카 스투파를 돌 때는 신라 진흥왕, 고구려 광개토왕, 백제 성왕 등이 닮고자 한 ‘아육왕(아소카왕)’과 우리나라와의 인연을 떠올린다. 남인도의 벨란카니와 아요디아에서는 석탈해와 허황후의 고향과 근원을 찾고, 중국에서는 혜초와 의상대사의 흔적을 목격한다.


이 책의 내용은 치밀한 현지 취재와 『삼국사기』, 『경상도지리지』, 『삼국유사』, 『대당서역기』, 『디파밤사』, 『화엄경』 등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집필되었다. 국내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서적과 비전문가들이 취재하여 올려놓은 인터넷상의 주마간산 식 자료는 현지 지식인들의 이야기와 다소 차이가 났다. 이에 저자는 앞으로 관심을 가질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오해를 바로잡거나 그릇된 가설에 문제 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가능한 한 현지 지식인과 인터뷰를 많이 하여 잘못 알려진 지식과 엉뚱한 정보를 바로잡고자 했다. 검증된 사료와 언어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저자가 발견한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다섯 나라가 그저 낯선 땅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불교문화는 영향력이 융성했던 과거에 비하면 아쉬운 면이 많다. 저자는 불국 기행을 통해 불교문화의 과거를 살필 뿐만 아니라 불교의 현재와 미래까지도 헤아린다. 네팔에서는 석가족 ‘슈라즈 샤카’ 씨를 만나 석가모니의 후예들의 역사를 듣고, 남인도에서는 힌두교에 밀려 쇠퇴하는 불교를 목격하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불교 기반이 단단하고 활동 영역이 넓은 스리랑카에서는 담불라 승단 종정스님인 수만갈라 스님을 만나 인터뷰하고 한국 불교가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 중국에서는 운강 석굴에 몰려든 참배객을 보며 어깨를 펴고 있는 중국 불교의 모습을 우리 불교의 현재와 비교한다. 저자의 이러한 통찰은 이 책에 깊이를 더하며, 독자가 다양한 문화적 사유를 하도록 돕는다.

이와 같이 현장의 감흥과 현지인을 통해 직접 보고 들은 정보,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한 풍부한 지식이 녹아든 글은 저자의 감상과 현지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낸 유동영의 사진으로 한층 심도 있게 다가온다. 『불국기행』은 5개국을 방문할 예정인 이들에게는 훌륭한 사전 길잡이이자 현지 가이드가 될 것이며, 이미 이 나라를 다녀온 이들에게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실들과 다시 한 번 조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첫눈이 오면 공휴일이 되는 나라, 부탄/히말라야 기운으로 축복받은 땅, 네팔/신라 여섯 씨족장과 석탈해가 떠난 땅, 남인도/연꽃을 들고 절에 가는 불심의 나라, 스리랑카/의상대사와 혜초가 순례한 불국토, 중국 오대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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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와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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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말단 교정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문자는 사십을 바라보는 노처녀로 알려져 있다. 주위에서 안스럽게 여길만큼 더러는 짜증이 날만큼 비루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문자에게는 사랑하는 남자도 있고 심지어 딸까지 낳은 적이 있다. 서영은의 소설 <먼 그대>(1983)에 등장하는 문자라는 주인공은 분명 일상에서 흔히 보는 그런 캐릭터는 아니다. 유부남인 한수를 사랑하고 자식까지 빼앗겼지만 그녀의 한수에 대한 사랑은 처절하리만큼 절대적이다. 이런 문자에게 한수는 돈까지 요구하지만 문자는 거절하는 법이 없다. 한수가 먼 곳에 있을수록 문자의 한수에 대한 열망은 더욱 더 불타오른다. 한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문자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그녀의 대응 방식은 늘 '절대 긍정'이다. 마치 구도자의 고행을 보는 듯 하다. 도대체 왜 문자는 자신을 학대하면서까지 '절대 긍정'의 삶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가엾은 자식, 엄마가 네게 지운 짐이 너무 가혹하지? 하지만 너도 네 힘으로 네 속에서 낙타를 끌어내야 한다. 엄마가 너의 삶을 안락한 강변도 있는데 굳이 고통의 늪가에 던져놓은 이유를 그 낙타가 알게 해줄 거야. 그것이 사랑이란 것을 알게 해줄 거야.' -서영은의 소설 <먼 그대> 중에서-

 

▲사진> 구글 검색 

 

저자가 이 시점에서 등장시키는 이미지가 바로 '낙타'다. 어떤 가혹한 삶에도 '절대 긍정'의 태도를 고수하는 이런 문자를 저자는 '불사의 낙타'로 표현한다. 사실 문자의 생존 방식에는 도달할 수 없는 상황이 더 처절하고 가혹할수록 문자 자신의 열망은 극대화되는 역설이 숨어있다. 사막이라는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의 조건 속에서도 등의 혹에 저장된 지방을 물로 바꿔가며 생존한다는 점에서 '낙타'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인물이 바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낙타는 문학이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생경한 동물이다. 기껏해야 동물원에서 보는 게 전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옛 문학 속에 낙타가 등장한다면 선뜻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동물로써의 낙타는 아니다. 어쨌든 옛 글 속에 낙타를 살펴보기 전에 낙타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등에 난 혹이 먼저 연상되는 낙타는 중앙 아시아와 아시아 남서부에 분포한다. 낙타가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에서 오랫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등에 난 혹 때문이라고 한다. 혹 속의 지방을 분해시켜 필요한 수분을 얻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22년 창경원 동물원 개원 당시 처음 수입했으나 전쟁 중에 죽었다고 한다. 이후 1955년 다시 한 쌍을 수입해 현재는 각 동물원에서 관람용으로 사육하고 있다.

 

조선 초기 김시습의 한문소설집 《금오신화》 에 <만복사저포기>와 함께 전해지고 있는 <이생규장전>은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애정소설인데 주인공 이생은 노변에 있는 양반집 딸 최씨녀를 알게 되고 밤마다 그 집 담을 넘어 밀애를 즐겼는데 이 이생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낙타교' 옆이었다. 설마 이 낙타교가 동물 이름 '낙타'에서 따온 다리 이름일까 싶을 것이다. 지금도 생경한 동물인데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동물이었을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생규장전>에 등장하는 낙타교는 실제로 개성에 있는 다리 이름이었고 동물 '낙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진> 구글 검색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에 거란이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고려에 보내왔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중국까지 넘보고 있었다. 거란 태종은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고려와 연합해 중국을 침략할 목적으로 고려 태조에게 사신과 함께 낙타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 태조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연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란이 보낸 사신은 모두 섬으로 귀양보내고 사신과 함께 보내온 낙타 50필은 개성 만부교 아래 매달아 굶어죽게 했다고 한다. 일명 '만부교 사건'으로 이후 사람들은 만부교를 '낙타교'로 불렀다고 한다.

 

그야말로 낙타 수난 시대다. 낙타를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태반인데  낙타 고기와 낙타유를 먹지 말란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 대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예방책이라고 발표한 황당한 사건 때문이다. 낙타 고기와 낙타유가 유통된 적도 없는데 이런 대책을 메르스 예방법이라고 발표한 정부를 보고 있자니 황당함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이런 안이한 대책 때문에 메르스는 어느덧 전국은 메르스 공포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더니 중도 지역에서 낙타가 감염 매개원이라고 알려진 메르스는 그 좁은 바늘 구멍을 유유자적 통과하고 있다. 메르스 초기 대응에 실패한 정부의 안이함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불과 1년 남짓한 시점에 발생한 메르스 공포는 대한민국 정부가 여전히 안전 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소극적인 정부를 보면서 메르스는 이미 예견된 공포가 아니었을까? 국민 안전에 무관심한 정부가 국민들의 일상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또 애먼 낙타는 무슨 죄냐 말이다. 서영은의 또 다른 소설에 <사막을 건너는 법>이 있다. 국민을 외면한 정부가 존재하는 한 이 혹독한 사막과 같은 현실을 우리는 내 안의 낙타를 타고 건널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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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르, 지구가 되고 바다가 되고 산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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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들의 이야기는 주로 구전으로 전승되었는데 13세기에 처음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특히 아이슬란드 작가인 스노리 스툴루손(Snorri Sturluson, 1179~1231)이 쓴<산문 에다 Prose Edda>에 북유럽 신화의 많은 것들이 기록되었다. 또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운문 에다 Poetic Edda>에 더 많은 기록들이 추가되었다. 앵글로색슨 족의 위대한 시<베어울프 Beowulf>와 핀란드의 엘리아스 뢴로트가 쓴<칼레발라 Kalevala>에도 북유럽 신화 속 위대한 신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편집자주-

 

이미르(Ymir)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거인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전 태초에는 긴눙가가프(Ginnungagap)라는 허공만이 존재했다. 이 태초의 허공인 긴눙가가프 양편에 두 영역이 나타났는데 남쪽에는 불의 영역인 무스펠하임(Muspelheim)이 북쪽에는 추위와 얼음의 영역인 니플하임(Niflheim)이 그것이었다. 두 영역 사이에는 무스펠하임의 뜨거운 공기와 니플하임의 차가운 공기가 만나는 곳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북유럽 신화 최초의 거인인 이미르라는 서리 거인이 형성되었다.

 

최초의 거인인 이미르는 무스펠하임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잠이 들었고 그의 몸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르의 땀에서는 또 다른 서리 거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바로 요툰(Jotunn)이다. 흉악한 거인인 요툰은 온 대지를 뒤덮을 정도로 번성했다. 요툰은 이미르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그렇다면 허공만이 존재한 긴눙가가프에서 이미르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미르와 함께 얼음이 녹으면서 생긴 거대한 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구글 검색 

 

이미르와 다른 서리 거인들은 아우둠라(Audhumla)의 젖을 먹고 생존할 수 있었다. 이미르의 땀에서 태어난 서리 거인족인 요툰이 번성하는 데도 아우둠라가 있어서 가능했다. 아우둠라가 긴눙가가프를 돌아다니며 얼음을 핥아 나가자 얼음에 갇혀 있던 서리 거인들이 얼음에서 풀려났고 점차 무리를 형성했던 것이다. 아우둠라 때문에 얼음에서 풀려난 서리 거인 중 부리의 아들 보르와 볼트호른의 딸 베스틀라가 결혼해 북유럽 최초의 신이 오딘(Odin), 빌리(Vili), (Ve)를 낳았다. 삼형제 중 오딘이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신 중의 신으로 등극하게 된다.

 

북유럽 신화에서 이미르의 존재가 중요한 것은 이미르로 인해 긴눙가가프 시대를 지나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아버지 세대와의 전쟁을 통해 세대교체를 이룬 것처럼 오딘, 빌리, 베는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이미르와의 전쟁을 통해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오딘 빌리, 베 등 세 신은 이미르의 공격을 물리쳤고 이 때 죽은 이미르의 피는 모든 서리 거인들이 빠져죽을 만큼 거대한 바다를 이루었다. 베르겔미르와 그의 아내만이 살아남아 요툰하임(Jotunnheim)에 정착해 지금까지 신과 인간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노르웨이 중앙의 빙하를 안고 있는 고원을 요툰하임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 신화에서의 반고처럼 이미르의 죽음은 천지창조의 새 시대를 여는 일대 변혁의 시기이기도 했다. 오딘, 빌리 , 베는 이미르의 살로 지구를 만들었고, 부러진 뼈로는 산맥을 만들었다. 이미르의 피는 강과 바다와 호수가 되었고, 두개골은 거대한 하늘의 천장이 되었다. 또 불의 영역인 무스펠하임에서 불꽃을 쏘아 올려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들었다. 이미르의 사체로 세상을 창조한 오딘, 빌리, 베는 드디어 물푸레나무로 최초의 남자인 아스크(Ask)를 창조했고, 느릅나무로 최초의 여자인 엠블라(Embla)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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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푸스와 티아마트, 영웅 마르둑 탄생의 완벽한 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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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세계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지역으로 고대 도시들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고도의 문명은 물론 풍부한 신화까지 간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원전 4천년 경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주인이 되었으며 설형문자 체계는 물론 신전과 율법, 문학, 신화 등 수준 높은 문명 사회를 이룩하고 있었다. 기원전 2천 년경에는 셈족의 침략으로 바빌론에 아모리 왕조가 세워졌으며 이후 또 다른 셈족에 의해 앗시리아 제국이 세워졌다. 결국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수메르, 바빌론, 앗시리아 등 세 가지 버전으로 전해진다. –편집자주-

 

바빌론의 창조신화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제의 의식 문집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에누마 엘리쉬에 따르면 태초에 우주는 담수의 신 아푸스(Apusu)염수의 신 티아마트(Tiamat)만이 존재했다. 두 신은 부부의 연을 맺고 우주에 다양한 신들을 만들었다. 첫 번째가 라무(Lahmu)라하무(Lahamu)였다. 또 라무와 라하무가 결합하여 안샤르(Anshar)키샤르(Kishar)를 낳았고 안샤르와 키샤르가 결합해 하늘의 신 아누(Anu)와 물의 신 에아(Ea)를 낳았다.  에아로 인해 바빌론 신화 최고의 영웅 마르둑(Marduk)이 탄생하게 되었다.

 

▲티아마트의 최후. 사진>구글 검색 

 

마르둑이 태어나기 전 아푸스와 티아마트는 어린 신들이 너무 떠드는 바람에 조용히 쉴 수가 없었다. 아푸스는 자신의 시종 뭄무(Mummu)와 함께 어린 신들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다. 아푸스의 계획을 알게 된 티아마트는 자신이 낳은 신들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아푸스는 애초 계획을 밀어붙였고 어린 신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아푸스는 에아에 의해 시종 뭄무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고 에아는 이번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아푸스라는 궁전을 세웠고 이 곳에서 마르둑을 낳았다.

 

에아가 낳은 마르둑은 기존의 신들과는 많이 달랐다. 힘이 엄청나게 셌고 성격까지 난폭했다. 이런 마르둑 때문에 하늘의 신들은 불만이 커져갔고 급기야 아푸스가 어린 신들과 전쟁을 벌일 때 반대했던 티아마트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결국 티아마트는 마르둑을 없애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전사 킹구(Kingu)를 비롯해 수많은 괴물을 만들어 남편 아푸스의 원수를 갚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어떤 신도 티아마트와 맞설 용기가 없었다. 이때 마르둑은 자신에게 신전회의의 전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티아마트와의 결투를 수락했다. 드디어 바빌론 신화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마르둑은 활과 화살, 곤봉, 번개, 그물을 준비해서 티아마트와 맞섰다. 마르둑은 그물을 던져 티아마트를 사로잡았다. 이 때 티아마트가 자신을 집어삼키려고 입을 벌리자 바람을 일으켜 티아마트의 몸을 부풀린 다음 화살을 쏘아 티아마트를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킹구를 비롯한 티아마트의 전사들도 마르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마르둑은 신 중의 신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마르둑은 아버지 에아가 그랬던 것처럼 에샤라(Esharra)라는 신전을 만들고 거기에 다른 신들을 거주하게 했다.

 

티아마트를 물리친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둘라 갈라 반쪽은 하늘을 만들고 반쪽은 땅을 만들어 천지를 창조했다. 또 신들의 노역을 대신해 줄 인간이 필요했는데 티아마트와의 전쟁에서 사로잡았던 티아마트의 전사 킹구를 죽이고 킹구이 몸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간을 만들었다. 드디어 신들은 노동에서 해방되었고 인간들은 신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신들에게 술과 음식을 바쳤다. 이 곳이 바로 바빌론에 있었던 에사길라(Esagila) 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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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쿠마츠와 우라칸이 그들의 창조물인 인간을 파멸시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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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문명은 중앙 아메리카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흔히 마야 문명이 번성한 지역은 3개로 구분되는데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 지방과 멕시코의 타바스코, 벨리즈 지역이 중심이었다. 마야 문명은 고전기와 신 마야 시대로 나뉜다. 900년까지를 고전기로 보고 10세기 이후 16세기 스페인이 정복할 때까지를 신 마야 시대로 구분한다. 마야 신화는<포폴 부>라는 책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데<포폴 부>는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정복한 16세기 중반에 작성된 책으로 마야의 상형문자로 된 책의 사본이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에 태풍이 있다면 북대서양이나 카리브해, 멕시코만 등에서는 해마다 허리케인(Hurricane) 때문에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보곤 한다. 허리케인은 대서양 서부에서 발생하는 열대저기압을 일컫는데 마야 신화의 우라칸(Huracan)에서 유래했다.하늘의 심장이라고도 부르는 우라칸은 폭풍의 신으로 구쿠마츠(Gucumatz)와 함께 마야의 창조신으로 알려져 있다.

 

▲구쿠마츠. 사진>구글 검색 

 

<포폴 부>에 따르면 태초에 세계는 고요하고 적막한 거대한 빈 공간이었다. 오직 땅에는 물살에 휩싸이고 반짝이는 초록, 파랑 깃털로 둘러싸인 뱀 구쿠마츠와 하늘에는 하늘의 심장우라칸만이 존재하고 있었다.구쿠마츠와 우라칸은 거대한 빈 공간이었던 세계에 산과 땅, 나무와 숲 등 각종 자연을 창조해 냈다. 하지만 자연만으로는 허전했다. 구쿠마츠와 우라칸은 새로운 세상에 걸맞는 새 생명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 사슴, 재규어, 하지만 신들은 동물들의 지위를 인간의 먹이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구쿠마츠와 우라칸이 동물들을 만든 이유가 자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늘 찬양해 주길 기대했지만 동물들은 말을 할 줄도 몰랐고 신들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신들은 인간을 만들기로 하고 진흙으로 한 명의 인간을 빚었다.

 

그들은 그저 꽥꽥거리고, 짹짹거리고, 그르렁대기만 했다. 모두 제각각 다른 소리로 떠드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포폴 부> 중에서-

 

▲우라칸. 사진>구글 검색 

 

하지만 신들이 만든 최초의 인간도 그들의 뜻에 부합하지 못했다. 말을 하긴 했지만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고 진흙으로 만든 탓인지 너무 쉽게 부서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구쿠마츠와 우라칸은 점쟁이 부부인 스피야콕(Xpiyacoc)과 스무카네(Xmucane)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스피야콕과 스무카네는 나무로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괘를 주었다. 신들은 즉시 나무로 인간을 만들었다. 다만 남자는 나무로 만들었지만 여자는 골풀로 만들었다고 한다.이제 신들이 원하던 대로 나무 인간들은 제물을 바치고 그들을 찬양했을까?

 

오히려 나무 인간들은 진흙 인간들보다 더 형편 없었다. 말할 수는 있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창조자들에게제물을 바치기는커녕 섬기려 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신들의 걱정은 나무 인간들이 자신들을 모욕하고 파멸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무 인간들도 파멸시키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구쿠마츠와 우라칸은 송진 비로 대홍수를 일으켜 나무 인간들을 쓸어버렸다. 뿐만 아니었다. 나무 인간들이 사용하던 도구와 다른 동물들도 그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결국 나무 인간들이 숨을 곳은 없었다. 홍수를 피해 살아남은 나무 인간들은 깊은 숲 속에 자신들의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마야 신화에 따르면 숲 속의 원숭이들이 바로 나무 인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신들의 신중치 못했던 창조 행위를 기억하려는 의미에서 남겨둔 것이라고 한다.

 

마야 신화에 따르면 이 일이 있은 후 당분간 세상에는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위대한 쌍둥이 영웅 스발란케(Xbalanque)와 우나푸(Hunaphu)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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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표절 지적, 맞다는 생각"인정일까 변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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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신경숙씨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단편소설 <전설>의 표절 파문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해당 소설을 작품 목록에서 제외시키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신경숙씨는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과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해 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실상 잘못을 인정했다. 아울러 문학상 심사위원을 비롯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숙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말했다. 또 처음 문제를 제기한 이응준 작가를 비롯해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학은 목숨과 같은 것이어서 글쓰기를 그친다면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며 원고를 써서 항아리에 묻더라도 문학이라는 땅에서 넘어졌으니까 그 땅을 짚고 일어나겠다며 절필 선언에는 반대했다.

 

처음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진일보한 입장 표명이지만 독자로서 느끼는 어딘가 씁쓸한 뒤끝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여전히 표절 인정보다는 여론의 뭇매를 피하기 위한 변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소설이 비슷하다는데 <우국>을 안 읽어봤냐는 질문에 신경숙씨는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봐도 안 읽은 것 같은데, 지금은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겠어요. 어떤 작품을 반쯤 읽다 말고 이건 전에 읽었던 작품이구나 하는 식이니까. 이번에 내 소설과 유사하다는 문장만 보는데도 죽을 것 같았어요."라며 여전히 표절이라기보다는 제기된 문장의 유사성이 우연의 일치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작가 신경숙 

 

<전설> 이외에도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작별인사>, <엄마를 부탁해>, <어디에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의 표절 의혹에도 비슷한 입장을 밝혔다. 특히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어디에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대해서는 "<생의 한가운데>를 중학교 다닐 때 읽기는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어머 어쩌면 이렇게 나랑 생각이 똑같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동서고금을 떠나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구나. 반가운 기분마저 들어요."라며 피해갔다.

 

신경숙씨는 평소에도 필사가 글쓰기에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전설>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들까지 무더기로 표절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이런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무의식적으로 외워진 문장을 자신의 문장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경숙씨는 "어떤 소설을 쓰면 그것은 온전히 그 사람만의 생각인가요? 내가 태어나서 엄마를 만나는 순간부터 엄마는 내 안에 들어와서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잖아요. 인간이 겪는 일들이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데 내가 쓰면 어떻게 다르게 보일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내 글쓰기였어요."라며 끊임없는 필사로 인한 오인 가능성을 부인했다.

 

독자들이 문학 작품을 접하고 때로는 작가에 열광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을 뛰어넘는 상상력과 독창성 때문이다. 신경숙씨 말대로 결코 다르지 않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다르게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그의 글쓰기였다지만 독자들이 읽을 때 결코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그 작품을 읽을만한 어떠한 이유도 갖지 못할 것이다. 독자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표절의 정의를 떠나서 말이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직접 베끼지 않았더라도 독자들이 읽었을 때 두 작품이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꼈다면 표절이냐 아니냐를 떠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구차한 변명이 표절보다 더 실망스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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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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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노와 콜랭/볼테르(Voltaire, 1694~1778, 프랑스)

 

우리나라에서는 '싸롱'이라는 이름으로 다방이나 양주집, 접대부가 있는 술집 정도로 위상이 낮아졌지만 원래 '살롱Salon' 문화는 프랑스 문화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살롱 문화는 귀족 부인들이 자기 집에 문화계 명사들을 불러 문학이나 도덕에 관해 자유롭게 토론을 벌였던 풍습으로 고전주의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요즘 유행하는 소통과 공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Habermas, 1929~)에 따르면 18세기 살롱은 문예와 정치 비판의 중심지였으며 부르주아 공론장의 맹아였다.

 

하지만 살롱 문화도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는데 예술의 교류라는 미명 하에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즉 문화 교류와 소통의 공간이 아닌 껍데기 뿐인 인간관계로 형성된 이해타산적인 사회로 변질되었다. 더 이상 계몽사상의 전달 공간이 아니었다. 살롱에 출입하기 위해 귀족의 작위도 돈으로 사고파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살롱에는 더 이상 진솔한 지성인들의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볼테르의 소설<자노와 콜랭>은 이런 살롱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은 소설이다.

 

▲18세기 살롱의 모습. 구글 검색 

 

어린 후작님은 심미안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후작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예술가들이 할 일입니다. 그래서 고귀한 사람은, 다시 말해서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결국은 그분들이야말로 마음대로 부리고 또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자노와 콜랭> 중에서-

 

자노와 콜랭은 요즘 말로 절친’, ‘베프였다. 하지만 자노가 갑자기 돈을 벌어 후작의 지위를 산 부모 덕분에 고향을 떠나 프랑스 사교계에 진출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리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프랑스 사교계가 살롱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에 졸부가 된 자노와 부모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에는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콜랭은 달랐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성실하게 일한 덕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 졸부가 되면서 우정을 저버린 자노와 달리 콜랭은 친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결국 자노는 콜랭의 누이동생과 결혼했고 자노의 가족들도 허영이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실 요즘도 몰락했던 살롱 문화의 몰인간적인 관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현대인을 대표했던 고독이라든지 소외라는 단어가 무색해질 정도로 다양한 방식의 소통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공간이 SNS가 아닐까 싶다. SNS 상에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만났던 과거의 소통과 비교한다면 피상적이고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고독소외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소통의 부족이 반목과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권위주의 시대의 일방적인 소통 구조가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과거 향수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이런 권위주의적 행태들은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항의하고 분노하는 소통마저도 막강한 권력과 권력 주변을 맴도는 언론에 의해 매도 당하고 차단 당하는 게 요즘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세월호 사고가 여전히 역사적 교훈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이런 소통 부재 탓이 아닐까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글자 그대로 인간적이어야 한다. 소통의 방식이 다양한 이름으로 진화하고 진보하더라도 인간적인 관계가 배제된다면 과거의 그림자 아래서 괜한 체력 소모만 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제자리 걸음이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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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달콤한 속삭임, 그런데 왜 나는 눈물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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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지니와 폴/빌리에 드 릴아당(Villiers de Lisle-Adam, 1838~1889, 프랑스)

 

18세기 인도양 한가운데 있는 섬 일드 프랑스(지금의 모리셔스)에 달콤한 사랑에 빠진 폴과 비르지니라는 선남선녀가 살고 있었다. 평민 집안의 아들이었던 폴과 달리 비르지니는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이었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신분 차이도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두 집안은 신분 차이를 넘어 스스럼없이 지냈고 폴과 비르지니도 마치 친남매처럼 지내며 성장했고 점차 나이가 들면서 둘은 사랑의 열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귀족 집안이었던 비르지니는 정식 교육을 시키고 재산을 상속시키겠다는 백모의 부름을 받고 본국인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비르지니는 폴만 섬에 남겨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주위의 끈질긴 설득에 폴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섬을 떠났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고 약속대로 비르지니는 다시 섬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비르지니가 탔던 배가 섬 가까이에서 그만 폭풍우를 만나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 다행이 침몰 지점이 섬에서 가까워 대부분의 승객들은 헤엄을 쳐서 구조를 받았지만 비르지니는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옷을 벗는 게 부끄러웠던 것이다. 죽은 비르지니의 손에는 폴의 초상이 꼭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Bernardin de Saint Pierre, 1737~1814, 프랑스)가 1787년에 발표한 소설 <폴과 비르지니>의 줄거리다.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 폴과 비르지니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죽음보다 더 부끄럽고 두려웠을까? 요즘 시각으로 보면 선뜻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소설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상징이 된 이유는 충분히 납득할 만 하다. 하지만 거의 한 세기 후에 발표된, 이름 순서만 뒤바뀐 소설 한 편에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 빌리에 드 릴아당이 1874년에 발표한 소설 <비르지니와 폴> 때문이다. <폴과 비르지니>보다 더 감동적인 사랑을 보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젊은 연인, 비르지니와 폴의 밀회를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피에르 오거스트 코트의 그림 '폭풍'. 피에르의 소설 <폴과 비르지니>에서 영감을 받고 그렸다는 설도 있다.

사진>구글 검색 

 

헤어진 지 수년이 지나도록 당신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그 추억은, 귀중한 유리병 속에 넣어둔 동양의 향유 한 방울과도 같다. 그 향기는 너무도 섬세하고 강렬해서, 그 병을 당신의 무덤 속에 넣어두면, 은은하고 영원한 그 향기는 당신의 육신의 먼지보다 더 오래 남아 있으리라. -<비르지니와 폴> 중에서-

 

사랑의 추억을 '동양의 향유 한 방울'에 비교한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지금은 어린 소녀들의 기숙학교가 된 수도원 철책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열 다섯 살 젊은 연인의 밀회를 지켜보고 있다. 소녀의 이름은 '비르지니', 소년의 이름은 '폴'. 하지만 두 천사가 사라진 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만다. 두 천사, 젊은 연인의 대화가 문제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양의 향유 한 방울'처럼 은은하고 영원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밀회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청춘 남녀들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이 젊은 연인에게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짧막하게 옮겨보면 이렇다.

 

"3년 후에 우리는 결혼하게 되겠죠? 당신이 시험에 붙기만 하면 말이에요. 폴!"

"그래요. 그렇게 되면 나는 변호사가 되는 거죠. 변호사가 된 다음 몇 달 후엔 금세 유명해질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돈을 벌게 되겠죠."

 

"폴, 폴, 그러면 좋지 않아요. 그 고모님한테는 언제나 아주 상냥하게 대하고 비위도 잘 맞춰 드려야 해요. 고모님은 늙으셨으니까 언젠간 우리에게도 유산을 조금 남겨 주실 거예요."

 

"물론 좋지요. 폴! 엄마가 저에게 결혼 지참금으로 농장이 있는 시골의 작은 집을 주실 거예요. 그럼 우리 가끔 그곳으로 여름을 보내러 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할 수 있으면 그 집을 조금씩 늘려 봐요. 농장에서도 수입이 좀 들어오겠죠." -<비르지니와 폴> 중에서-

 

릴아당이 피에르의 소설을 이름 순서만 바꾼 게 아니었다. <폴과 비르지니>의 순수한 영혼은 <비르지니와 폴>에서는 세속적인 인물로 바뀌었다. 아마도 산업혁명 이후 팽배해진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를 비꼬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순수한 가치보다는 돈으로 평가되는 사랑의 몰락을 저자는 눈물을 흘릴만큼 슬프고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사랑의 가치가 이렇게 변질됐는데, 20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의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게 아니 시대에 맞게 변하는 게 사랑이라지만 그 순수하고 맑은 가치만은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게 또 사랑이 아닐까? 

 

어쩌면 '갑돌이와 갑순이'도 이제는 '갑순이와 갑돌이'로 바뀌었고, '철수와 영희'도 '영희와 철수'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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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과학자 뉴턴이 범죄 수사관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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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과 화폐위조범/토머스 레벤슨 지음/박유진 옮김/뿌리와이파리 펴냄

 

1695년, 53살의 아이작 뉴턴은 이미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상태에서 뜻밖의 전직을 했다. 연금술을 평생 은밀히 연구해오다 신경 쇠약에 걸린 후 위안을 찾던 뉴턴은 대학 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간 혁신적인 발견을 수차례 해낸 곳 케임브리지를 뒤로하고 런던으로 가서 영국 조폐국 감사직을 맡았다. 그런 뉴턴보다 먼저 런던으로 간 또 다른 천재가 있었으니 바로 범죄자 윌리엄 챌로너였다. 화폐 위조에 비상한 재주를 갖춘 덕분에 챌로너는 런던 암흑가에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챌로너는 만만찮은 신임 조폐국 감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화폐가 막 등장하고 있던 17세기 런던의 법정과 거리에서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아이작 뉴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람들이 대부분 유일하게 기억하는 그의 첫 경력, 그러니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학생, 특별연구원,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로 보낸 경력은 35년간 지속됐다. 하지만 1695년에 뉴턴은 런던으로 와서 영국 조폐국 감사직을 맡았다.그는 사람이나 상황을 관리하는 일에 학식도 경험도 별 관심도 없었지만 조폐국 감사로서는 탁월했다. 그는 4년간 재임하면서(이후 그는 조폐국장으로 27년간 근무했다) 화폐 위변조자 몇십 명을 추적하고 체포하고 기소했다. 그는 증거, 부주의한 대화, 밀고로 촘촘히 짠 그물에 적이 걸려들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주 빨리 배웠다. 런던의 암흑가는 뉴턴과 같은 인물과 맞닥뜨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 바닥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가장 주도면밀한 지성인과 싸울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이 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독특한 관점에서 쓴 뉴턴 전기다. 뉴턴의 과학적 업적은 최소한만 언급하고, 뉴턴이 어쩌다 조폐국에서 탐정 노릇을 하게 됐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저자는 각종 뉴턴 전기는 물론이고, 뉴턴과 지인 간의 편지, 그의 경쟁자인 윌리엄 챌로너의 전기, 당시 조폐국 문서와 재판 기록 등을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자는 기존의 뉴턴 전기에서 소홀하게 또는 왜곡해서 서술된 부분을 보완하고 반박한다.예컨대 일부 전기 작가들은 뉴턴이 위폐범들을 추적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무자비함을 보여줬으며, 그것을 정신에 문제가 있는 냉혹한 인간의 증거로 간주했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이는 필시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오히려 뉴턴은 그냥 자기 일을 하던 일반적인 인물, 당시 통용된 방법을 이용하던 관료”였을 뿐이다.

뉴턴의 행적만큼이나,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챌로너의 인생사를 살펴보는 일도 흥미롭다. 뉴턴은 챌로너에게서 자신의 만만찮은 지성에 도전할 만한 적수의 기운을 감지했다. 챌로너는 잡범이 아니었다. 그가 만들었다고 주장한 위조화폐 3만 파운드는 실로 거액이었다. 오늘날 통화로 환산하면 무려 400만 파운드(약 68억 원)에 상당했다. 챌로너는 재정과 주화 제조술에 대한 소논문을 의회에 제출할 만큼 박식했고, 6년간 야심차게 범죄를 일삼으면서 기소를 피할 만큼 교활했다. 그는 실수에 무자비해 적어도 두 사람을 죽였고, 그러면서 매번 이익을 챙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챌로너는 대담했다. 그는 신임 조폐국 감사가 무능하다고 비난했고, 심지어 감사가 조폐국을 운영하면서 사기를 쳤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뉴턴과 챌로너 각각의 행적을 주축으로 하여 두 줄기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둘의 대결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저자는 17세기에 만들어진 옛날 문서들의 행간을 읽고 추리력과 상상력으로 그 여백을 메우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결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느 시골의 한 과학 신동과 또 다른 시골의 한 명민한 악동이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런던에서 수사관 대 범죄자로 맞대결하게 되는가. 그렇게 시작돼 2년 넘게 맹렬히 계속된 두 사람의 추격전 속에서 그들은 각자 어떤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는가. 이런 주제들을 놓고 저자와 함께 두 사람의 자취와 당시 사회적 정황을 돋보기 들여다보듯 꼼꼼히 살피며 퍼즐 조각을 맞춰보는 것, 이것이 바로 추리소설 형식을 가미해 읽는 재미를 높인 이 책의 독자가 하게 될 일이다.

뉴턴과 챌로너가 활동했던 1690년대 중반은 영국 화폐위조의 황금기였다. 뉴턴이 1696년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유통 중이던 주화 열 닢당 한 닢 이상이 가짜였다. 이는 전쟁 비용, 은화 유출, 통화제도 붕괴 등 정부 재정에 문제가 생긴 결과로, 영국은 말 그대로 돈이 바닥난 상태였다. 이런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뉴턴만은 아니어서,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로크와 유력한 경제사상가 찰스 대버넌트 등도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여러 번 내놓았다.세계 무역이 부상하고 있던 그 시대에 런던 시장의 텅 빈 돈궤는 실로 새로운 현상이었다. 여러 필자가 갖가지 소견과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런 논쟁과 비판의 홍수는 화폐제도 붕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반영했을 뿐 아니라, 너무 좁게 ‘과학혁명’이라 불러온, 당시 영국을 주름잡았던 변혁의 일상적 경험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공한다.


화폐를 둘러싼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려는 여러 복잡한 과정 속에서 현대적 의미의 화폐, 곧 종이돈이 발명됐다.챌로너는 금속화폐가 더 이상 돈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가 아님을 누구보다도 빨리 파악했다. 학계 밖에서, 과학혁명은 새로운 돈의 세계가 성립해감에 따라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종이돈, 교환 가능한 약속, 채권, 융자는 모두 추상적 개념이었다. 그런 개념을 이해하려면 수학적 추론 능력이 필요했다. 챌로너는 주변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사상과 실제의 그런 급진적 변화로 생겨난 기회를 붙잡을 만큼 충분히 재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범죄는 불행하게도 뉴턴의 내밀한 신앙심을 건드렸다. 모든 화폐위조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겼기 때문이다. 금속 원반을 법정 통화로 탈바꿈시키는 마법은 주화 앞면의 국왕 두상 이미지에서 비롯됐다. 국왕은 신의 은총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 왕의 초상을 도용하는 행위는 불경죄, 곧 군주라는 신성한 사람에게 맞서는 범죄에 해당했다. 챌로너를 쫓던 뉴턴의 태도는 지나치게 결연했는데, 그 동기에는 국가적 이유 말고도 다른 동기, 곧 신앙적 이유가 섞여 들어가 있었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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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보다 더 짜증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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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의 소설 <장마>는 이렇게 시작된다.

 

‘밭에서 완두를 거둬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그렇다. 소설 속 표현처럼 장마는 늘 음침하고 스산하다. 하지만 올 장마는 비도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고 평년보다 늦게까지 장마가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보니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어야 할 소나기가 오히려 습도만 높여 불쾌지수가 상승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어젯밤 일할 때도 그랬다. 낮 동안 덮혀진 땅을 채 식히기도 전에 한바탕 쏟아지고 만 소나기 때문에 땅에서는 연기처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몸뚱이는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땀에 땅에서 올라오는 습도까지 더해져 기분 나쁘게 끈적이고 있었다. 시간이 더디 가는 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오늘은 절기상으로는 대서이면서 중복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일년 중 가장 덥다는 날이다. '염소뿔이 더위에 녹는다'는 속담도 대서를 두고 나온 말이다. 대개는 이 즈음에 장마가 끝나고 말복까지 가장 더운 날씨가 이어지는데 올해는 늑장 장마까지 겹치면서 끈적끈적하니 도대체 기운이라곤 어디에 숨었는지 그야말로 녹초가 될 지경이다. 어디 보양식이라도 있을까 두리번거려 보지만 실상은 만사가 귀찮다. 

 

▲장마. 사진>SBS 

 

 

한바탕 쏟아진 후 올라오는 열기를 보니 어릴 적 추억이 문득 떠오른다. 불에 타는 듯 푹푹 찌는 초가집 마당에 번개가 몇 번 번쩍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기 시작했다. 마당은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안개가 모락모락 피기 시작했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마루 바로 앞 흙마당은 깊에 고랑이 패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마당에는 그리 크지 않은 생명체가 팔딱거리고 있었다. 미꾸라지였다. 산 중턱에 지은 집이라 미꾸라지가 들어올만 한 어떤 수로나 통로도 없었는데 어쨌든 신기했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빗줄기와 함께 떨어졌다고 했고 그렇게 믿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이었지만 굳이 과학적으로 캐묻고 싶지는 않다. 추억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대서 즈음에 먹는 추어탕이 최고의 보양이 되었던 모양이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서라도 너도나도 보양식을 찾아 발품을 팔고 있다. 삼계탕, 보신탕, 추어탕, 민어탕…. 사람마다 체질이 다 다르니 그 체질에 맞는 보양식도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삼시세끼 밥만한 보양식이 있을까 싶다. 체질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어질 습한 무더위에 짜증날 일만 없어도 보양식이 굳이 필요 없을텐데 말이다. 

 

퇴근하고 오늘 아침 신문을 보면서 단발성으로 내리는 장마비보다 더 짜증이 밀려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느닷없는 노동 개혁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총대를 매고 나선 것이다. 표를 잃을 각오로 노동 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그 큰 덩치에 공주님 헛기침만 들어도 방울소리 요란스레 울리며 따라다니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여름 냉면값도 안되는 시급에 그나마도 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가 수 백에 이른다는데 뭘 그리 개혁할 게 있다는 것인지. 노골적으로 재벌만 챙겨주기에는 조금은 민망(?)했던 것일까? 아니면 공주님 안중에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힘겨운 일상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노동자, 서민 죽이기에는 역대급 정권이라 할 만 하다.

 

장마비보다 더 짜증난 일은 서민을 졸로 보는 늙은 공주와 그 졸개들의 만행을 침묵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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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밝힌 한글의 언어학적 가치와 탁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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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발명/정 광 지음/김영사 펴냄

 

한글 연구의 차원을 바꾼 심도 깊은 역작. 한글 제정의 동기와 목적, 발명에 참여한 인물과 제정 시기부터 한글이 과학적인 이유와 영향을 받은 문자까지. 기존 한글 연구의 맹목적 정설을 뒤집는 과학적 연구. 그동안 학계가 다루어온 한글에 대한 모든 쟁점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영명하신 세종대왕이 사상 유례없는 독창적 글자를 만드셨다’는 신화를 넘어, 과학적이고 이론적 바탕 위에서 한글의 역사적 의미와 언어학적 가치, 탁월함을 밝힌다.

 

한글, 왜 만들었는가


한글은 한자음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발음기호로 만든 것이다. 원나라가 성립하고 이전 중국어와 발음이 전혀 다른 한아언어(漢兒言語)가 대두되면서 중국의 한자음과 우리 한자음이 크게 달라져 소통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우리 것을 교정하여 <동국정운> 한자음을 만들었고 이에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발음이란 의미로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유신들은 중국 한자음이 정음을 표기하는 문자라는 뜻으로 정음(正音)이라 불렀다.


교착어인 우리 말 쓰임에 고립어인 한자는 어순과 의미 전달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가 ‘변음토착(발음을 바꿔서 토를 달다)’의 난제를 해결하자 세종은 이 문자로 우리말을 기록할 수 있다고 보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을 짓게 하고 스스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이를 확인했다. 이 책에서는 세종이 이 둘을 합편하여 <월인석보>를 간행하면서 권두에 훈민정음의 <언해본>을 붙여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에서 <언해본>의 이 앞에 있는 구절 “國之語音이 異乎中國?야 與文字로 不相流通?? ― 나랏 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언해문이 매우 애매하여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즉, 한문 원문은 <한문본>과 <해례본>에서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 [한자음에 대한] 우리나라의 발음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 하여 한자에 대한 우리의 발음과 중국과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다만 언해문은 “우리말이 중국어와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고 언해되어 오해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 서문의 기본적인 뜻은 어디까지 한자음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지 언어의 차이를 말한 것은 아니다.

 

 

 


고려 전기(前期)까지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배운 한문으로 중국인과 소통이 가능하였는데 원대(元代) 이후 북경(北京)의 한어(漢語)의 발음이 우리의 전통 한자음과 매우 달라서 이 말과는 전혀 통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 한자음을 수정하여 예전처럼 한문 학습에 의하여 중국과의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로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한자음을 구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개정된 한자음이야말로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한자음, 즉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으며 이것의 발음기호로 한글을 제정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책에서 특별히 강조된 것은 한자를 그대로 읽는 것이다. 아전인수 격이나 자기 멋대로 한자를 해석하지 말고 원래의 뜻대로 읽자는 것이다. 그래야 보다 정확한 사실을 밝힐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글자”로 해석한다든지 ‘정음(正音)’을 “올바른 글자”로 보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음(音)’은 발음이지 글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자에 있지도 않은 뜻이나 발음으로 한자를 멋대로 읽는다면 어떻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수양대군이나 동궁, 정의공주 등 가족과 세종이 직접 골랐다는 친간팔유(親揀八儒)로 불리는 성삼문, 신숙주 같은 젊은 학자의 도움도 있었지만, 한글 창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불가의 학승들이었다. 고대 인도의 조음음성학이 팔만대장경에 포함되어 고려와 조선에 유입되면서 불가의 학승들이 음성학을 공부,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훈민정음 <언해본>이 불서(佛書)인 <월인석보>에 부재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고대 인도에서 발달한 음성학은 비가라론(毘伽羅論), 한자로 번역하여 성명학(聲明學)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속에 들어 있어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입되었다. 한글의 창제에 불가의 많은 학승들이 참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글은 이러한 학술적 배경을 갖고 창제된 것이어서 과학적이며 발달된 표기체계를 보이는 것이다.


『죽산안씨대동보』의 ‘정의공주유사’에 보이는 기사에서 정의공주가 한 일은 ‘변음토착’을 해결한 일이다. 이것은 한문의 구결(口訣)에서 형태부, 즉 조사(助詞)와 어미(語尾)의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토(吐)를 달 때에 “-은(隱), -이(伊), -??니(爲尼), -이라(是羅)”와 같이 한자의 발음과 새김을 빌려 적는다. 즉, 앞의 예에서 “-??니(爲尼), -이라(是羅)”의 ‘尼, 羅’는 발음을 빌렸지만 ‘爲, 是’는 새김을 빌려 ‘-??, -이’로 읽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是)’와 ‘위(爲)’라는 자음(字音)을 바꿔서 ‘-이’, ‘-??’로 토를 단 것을 ‘변음토착(變音吐着, 음을 바꿔서 토를 달다)’이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변음의 토는 한자를 익숙하게 구사하고 한문에 정통한 유신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고 괴로운 문자 표기였다. (…) 훈민정음으로 토를 다는 경우 이러한 ‘변음토착’의 어설픈 한자 표기는 완전하게 해소된다. 뿐만 아니라 고유어 표기에서 한문과 다르게 조사와 어미를 붙여 써야 하는 교착적 문법구조의 우리말 표기에 대한 인식이 정리된 것 같다. 의미부는 한자나 이두로 표기해왔지만 조사와 어미와 같은 형태부 표기가 한문과 다른 우리말 표기의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한글로 토를 단 이후로는 변음토착과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한문 본문과의 구별도 확실해져서 이해가 훨씬 쉽게 되었다. 이로부터 세종은 새 문자로 고유어를 표기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이 고안한 문자로 우리말 표기에 몰두하였는데 이것은 동궁, 수양, 안평, 정의 등의 자녀들과 함께 작업하였다(졸고, 2006). 또 자녀 가운데 수양대군은 신미(信眉), 김수온(金守溫) 등과 함께 <증수석가보(增修釋迦譜)>를 우리말로 언해하여 신문자로 우리말 표기를 실험하게 하였다.


이 시도가 성공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이 저술되는 중간중간에 세종은 스스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으면서 신문자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표음과 고유어의 표기를 자신이 직접 시험하게 된다. 이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을 몸소 확인하고 <해례본>에 붙인 자신의 서문과 예의(例義)를 우리말로 풀이하여 자신이 편집한 <월인석보>의 구권(舊卷)에 붙여 세상에 알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훈민정음의 <언해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언제 제정되고 반포되었는가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한글이 세종 28년 9월 상한에 간행한 소위 <해례본 훈민정음>으로 공표된 것으로 보아왔다. 그래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였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해례본>은 난삽한 성리학과 성운학의 이론으로 새 문자를 설명한 것이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다. 그래서 <해례본> 앞부분의 석장 반을 우리말로 풀이한 훈민정음의 <언해본>이 간행된 것을 한글의 공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 <언해본>은 천순 3년(1459), 즉 세조 5년에 간행한 <월인석보>의 권두에 <세종어제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첨부되었기 때문에 모든 연구자들이 이때에 훈민정음의 언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정통 12년, 즉 세종 29년의 간기가 있는 <월인석보>의 옥책을 근거로 하여 <월인석보>의 구권은 세종 생존 시에 간행되었고 여기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의 언해본을 붙여 간행하여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월인석보>는 그동안 학계에 알려진 것처럼 천순(天順) 3년, 세조(世祖) 5년(1459)에 처음 간행된 것이 아니라 세종 생존 시에 간행되었다. 이것은 세조의 어제(御製) 서문(序文)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세종이 구권(舊卷)을 간행하였으며 이 책의 권두에 <언해본>을 붙여 간행한 것은 전혀 새 문자의 공표를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정통(正統) 12년(1447), 즉 세종 29년에 개성 불일사(佛日寺)에서 제작한 <월인석보>의 옥책이 있다.


< 월석>의 옥책에 대하여 그동안 학계에서 의혹의 눈길로 보았으나 고려와 조선 전기에서는 흔히 있는 불사(佛事)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월석>의 구권(舊卷)이 존재한 것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이미 많은 논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언해본 훈민정음은 그 권수제(卷首題)를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한 것과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한 것의 두 종류가 있으며 이 두 권수제를 따로 가진 몇 개의 서로 다른 필사본도 전해온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어느 것이 원본이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들을 교합(校合)하여 정본(定本)을 세우려는 노력도 있었다. (…) 그러나 정통 12년의 <월석>이 존재한다면 신편(新編)에서와 같이 구권(舊卷)의 권두에도 <언해본>이 부재되었을 것이고 그 이름은 ‘세종어제(世宗御製)’가 아니라 그냥 ‘훈민정음(訓民正音)’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세종이 아직 생존했을 때이고 당시에는 그의 존호(尊號)가 ‘세종(世宗)’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글이 과학적인 진짜 이유


한글이 과학적인 것은 15세기에 제정된 훈민정음이 조음음성학의 이론에 입각하여 음운을 분석하고 문자를 제정한 때문이다. 20세기에 서양에서 발달한 조음음성학은 인간의 언어음(言語音)을 발성기관의 조음(調音) 메커니즘에 의거하여 조음 위치와 조음 방식으로 나누어 구별하였는데 세종대왕은 이보다 500여 년이나 앞서서 이러한 음성학의 이론을 동원하여 문자를 제정하고 이 문자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였으며 각 문자의 음가들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음성학적 이론을 세종은 어디서 알았을까?


뿐만 아니다. 중성(中聲)이라 하여 모음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였고 음절 형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리고 각 모음들이 서로 대립적으로 인식됨을 음양(陰陽)과 천지(天地), 오행(五行), 그리고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생위(生位) 성수(成數)로 설명하였다. 모음 음소의 존재를 대립이란 변별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음운을 대립적인 구조(構造)로 보고 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구조음운론은 20세기에 서양에서 발달하였다.

한글은 과연 사상 유례없는 문자인가


중국의 북방민족들은 한자로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하기가 어려워 일찍부터 스스로 표음문자를 제정하여 자국어를 기록했다. 기원후 650년경에 만든 티베트의 서장문자부터 10세기 거란의 요나라에서 만든 거란문자, 12세기 여진의 금나라에서 만든 여진문자가 그랬다. 13세기에 몽골의 칭기즈 칸은 위구르 문자를 빌려서 몽고어를 기록했고 14세기에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은 한글과 유사한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 한자음과 몽고어를 기록하였다. 이 책에서는 한글이 15세기에 이와 같은 북방민족의 전통을 이어 만든 문자라고 주장한다.

한글의 발명에 고대 인도 음성학의 영향이 있었음은 지금까지 아무도 지적한 바가 없다. 그러나 한글 제정의 근거가 되었던 파스파 문자가 티베트의 서장(西藏)문자에서 왔는데 서장문자는 인도 음성학의 이론에 의거하여 제정된 것이다. 따라서 7세기경에 제정된 서장문자나 13세기경의 파스파 문자, 그리고 15세기의 한글에 이르기까지 그 첫 글자가 ‘ㄱ’, 즉 /k/로 시작되고 이어서 /kh, g, ng/의 문자가 이어진다. 훈민정음에서도 /ㄱ, ㅋ, ㄲ, ㆁ/의 순서로 문자를 제정하였다. 모두가 인도 음성학의 영향 아래 제정된 것이다.


파스파 문자의 한자음 표음은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한자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즉, 한자음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음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므로 표음문자인 파스파자는 한자의 발음을 표음하는 데 더할 나위가 없는 좋은 발음기호였다. 이 문자가 고려 후기에 널리 애용된 것은 몽고어 표기를 위한 문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드디어 파스파 문자와 동일한 역할의 훈민정음을 제정하여 한자음 표기에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파스파 문자에서 인정한 입성 운미의 13자는 모두 음절 초의 자모를 다시 썼는데 이는 훈민정음에서도 종성으로 초성을 다시 쓴다고 한 것으로 보아 파스파 문자와 동일한 발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광운>계 운서음에서 입성 운미를 13개로 보았으나 훈민정음에서는 조선 한자음에서 운미의 종성이 초성 17자가 모두 구별되는 것으로 본 점에서는 차이가 난다. 즉 <해례>에서는 8개의 종성만이 구별됨을 인정하고 그 예를 조선어의 고유어로 보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훈민정음이 초, 중, 종성으로 구별하고 초성과 중성은 별도의 문자를 제정하였으나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고 한 것이 파스파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새 왕조의 통치계급 물갈이에 이용되기도 한 한글


이 작업을 통하여 새 문자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물론이고 우리말도 모두 적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자신의 서문(序文)과 예의(例義) 부분을 언해하고 그동안 작업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하여 <월인석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면서 언해한 부분을 권두에 붙여 간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새 문자, 즉 한글의 공포라고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모두 세종 28년에 이루어진다. 즉, 세종 28년 9월에 <해례본>이 간행되면서 새 문자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10월에 <월인석보>를 간행하면서 <언해본>으로 세상에 이 문자를 공표하게 된다. 11월에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이를 보급하고 12월에 시행한 이과(吏科)와 취재(取才)에서 훈민정음을 시험에 부과한다.


명明과 조선에서 한자의 표준음을 정하는 것은 당시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표준 한자음을 기준으로 과거시험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들의 추종 세력을 과거에 응과(應科)시켜 인재를 선발하여 통치 계급의 물갈이가 가능하였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표준 한자음에 맞추어 사대문서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표준 한자음, 즉 정음(正音)의 규정은 명明의 것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우리 한자음을 동국정운식으로 개편하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글의 발명이 그 역할을 대신 하였으므로 굳이 한자음의 개정까지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제3장 ‘5. 한글 제정의 과정’에서 정리한 새 문자 창제의 경위에 의하면 훈민정음을 세종 28년 10월에 공표하고 이를 2개월 후인 같은 해 12월에 인재 선발의 시험에 부과하였다. 이것은 바로 새 문자의 창제가 신, 구세력의 물갈이용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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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를 아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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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권여선/2013년

 

두 수의 비의 값을 분수라고 한다. a/b라는 식으로 표현하며 a를 분자, b를 분모라고 한다. 분자가 분모보다 작은 분수를 진분수, 분자가 분모보다 큰 분수를 가분수라고 한다. 파고 들어가면 더 골치가 아플터, 분수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면 아니 적용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 물론 장점이 많은 사람이면 그 값은 1보다 큰 가분수가 될 것이고, 지나치게 단점만 많은 사람이라면 진분수가 될 것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톨스토이는 왜 혁명가 노보드보로프를 하위 수준의 혁명가로 간주했을까?

 

노보드보로프는 혁명가들 사이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또 훌륭한 학자이고 아주 현명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는 그를 도덕적 자질로 봐서 일반 수준보다 훨씬 하위의 혁명가 부류로 간주했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노보드보로프는 이지력은 뛰어났지만 자만심 또한 굉장하여 결국 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이지력이 분자라면 자만심은 분모여서 분자의 숫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의 숫자가 그보다 측량할 수 없이 더 크게 되면 분자를 초과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즉 인간은 장점인 분자를 키우던지 아니면 단점인 분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존재 가치를 높여가는 것이다.

 

▲영화 '장수상회' 중에서 

 

여기 분수를 아는 중년의 연인이 있다. 영경과 수환, 그들은 쉰다섯 동갑으로 12년 전 봄 수환의 고등학교 동창인 신랑과 영경의 대학교 동창인 신부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났다. 그 후로 매일 만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영경의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둘은 분모가 지나치게 큰 커플이었다. 한 번씩의 결혼 실패를 경험했고 지금은 둘 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양원에서 사람들은 그들 부부를 '알루 커플'이라고 불렀다. 영경은 중증의 알코올중독이었고 수환은 류머티즘 환자였다. 둘의 사랑이 아슬아슬하면서도 안쓰러운 것은 보통의 연인보다 지나치게 큰 분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자를 늘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식으로 사랑을 지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뭐야? 마음이 식은 거야?"

"아니, 입냄새 때문에 그래."

"그게 뭐 어때서? 입이 말라서 그런 건데."

"그래도 오늘따라 유난히 짜고 쓰네."

"난 괜찮아."

"내가 싫어. 달콤까지는 안 되도 간간한 정도만이라도 지키고 싶어서 그래."

-<봄밤> 중에서-

 

 분모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분자라도 늘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둘의 사랑은 그렇게 애틋하고 애잔하다. 하지만 중증의 알코올중독자인 영경은 이혼 후 아이를 빼앗긴 아픔 때문인지 용양원에 있으면서도 술을 끊지 못했다. 결국 요양원 관계자들의 양해를 얻어 자주 술을 마시러 읍내로 나가곤 했는데 그들의 첫 만남이 봄밤이었듯 마지막이 봄밤일 줄은 누구도 몰랐다. 그날 봄밤도 영경은 읍내 편의점에서 술과 컵라면을 사가지고 모텔에 들어갔다. 그 시간 수환은 끝내 영경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모텔 주인의 신고로 의식불명인 영경이 요양원의 앰뷸런스에 실려왔을 때는 이미 수환의 장례가 끝난 후였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알았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봄밤> 중에서-

 

사실 영경은 알코올성 치매로 금치산 상태에 놓인 상황이었다. 수환이 떠나던 날 읍내로 나간 영경은 김수영 시인의 '봄밤'을 연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날 딱 하룻밤만 마시고 요양원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영경은 죽을힘을 다해 견디며 절제했다. 분모가 지나치게 커버린 그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영경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인내와 절제를 통해 분자를 키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삼자나 독자들이 볼 때는 수환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영경에게 단단한 적의를 품었겠지만 영경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수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환도 그랬다. 영경이 알코올중독 증상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외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 또한 수환 나름의 사랑법이었다. 수환은 영경의 이런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도 영경을 원망하거나 기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절.제.여.나.의.귀.여.운.아.들.이.여.오.오.나.의.영.감.이.여.……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삶의 방식과 사랑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태반이다. 하지만 왜곡하기 전에 이해하려는 과정은 생략되기가 일쑤다. 사랑도 그렇지만 단점인 분모보다 장점인 분자를 키워나가는 과정이 인생의 여정이 아닐까?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그런 분자의 방편일 것이다. 분모가 워낙 커서 우리의 분수를 1보다 키울 수는 없다치더라도 0에 수렴되어 가는 것보다는 1을 향해 치고 올라가는 과정이 제대로 된 인생이고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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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확천금이 헛된 꿈임을 입증해주는 방정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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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모든 공식/존 M. 헨쇼 지음/이재경 옮김/반니 펴냄

 

1986년 1월 28일, 미국에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 폭발하면서 7명의 승무원이 전원 사망하는 우주계획 역사상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다. 최고의 기술과 천문학적 비용이 집약된 곳이 바로 미국우주항공국일 것이다. 그런 곳에서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재해 연구가들은 챌린저호 폭발사고 같은 대참사의 이면에는 대개 ‘실패 사슬’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실패 사슬이란 일련의 사건이나 상황이 얄궂게도 한꺼번에 겹쳐 일어나 비극을 낳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부품 결함, 기계 오작동, 사람의 과실, 특이 기상, 소통의 부재(또는 잘못된 소통) 등이 두루 포함된다.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또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면 참사로 번질 수 있다. 반대로 실패의 고리 중 하나만 빠졌어도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경우도 많다. 당시 조사위원회 소속이었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은 TV 카메라 앞에서 작은 고무 오링을 소형 죔쇠에 끼워 얼음물에 담갔다가 꺼내 오링을 빼내는 실험을 했다. 오링은 본래의 동그란 모양으로 냉큼 돌아가지 못했다. 이 얼어붙은 작은 오링 하나가 챌린저호를 폭발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오링은 챌린저호 실패 사슬의 여러 고리 중 하나다. 당연히 사건이 일어나는 데는 더 많은 사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번에 일어난다. 그럼에도 실험으로 증명된 오링 하나는 눈에 보인 사슬인 만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책에서 다룬 방정식은 오링이 왜 제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를 확인해준다. 오링의 소재인 고무는, 외력을 가해 일어난 변형이 외력을 제거하면 원래 모양으로 돌아가는 성질을 가진 고분자 화합물이다. 이런 성질이 나타내는 거동을 탄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똑같은 실험을 낮은 온도에서 하면 결과는 달라진다. 좀처럼 제 모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고무의 유리전이온도보다 훨씬 낮은 온도라서 고무줄의 고무 성분이 ‘유리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방정식은 탄성중합체의 거동이 가장 ‘가죽 같아지는’ 온도, 즉 유리전이온도를 구하는 공식 중 하나다. 재료의 온도가 유리전이온도보다 낮을 때는 재료가 유리처럼 변해서 구슬 수준의 반동력을 보이고, 유리전이온도보다 높을 때는 고무처럼 변해서 고무공 수준의 반동력을 보인다. 하지만 유리전이온도에서는 재료가 가죽처럼 변해서 탄성이 최저가 된다. 챌린저호의 발사 당시 약 -1°C였던 낮은 기온 때문에 오링의 가죽질 거동을 극대화해 외력에 반응하는 속도가 느려져서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데 오래 걸렸다. 만약 그날 온도가 높았다면 오링은 제대로 복귀를 했을 테고, 인류의 우주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1920년 보스턴에서 짧지만 굵은 유명세를 누렸던 찰스 폰지. 그의 이름을 찾으면, 인물에 대한 설명보다는 다단계 사기가 먼저 검색된다. 요즘에야 흔하게 회자되는 다단계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의 사기행각은 전대미문의 대형 사건이었다.
다단계 금융사기를 뜻하는 폰지 사기Ponzi scheme의 원리는 간단하다. 합법적인 고수익 사업이 있다며 몇 사람을 꼬드겨 투자금을 받아낸다. 고수익이 보장된다는 약속에 투자자들이 넘어온다. 정작 투자대상이 될 사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다. 사기꾼은 계속 투자자를 모아 나중에 투자한 사람의 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투자수익금을 지급한다. 초기 투자자들이 떼돈을 벌다는 소문이 퍼지면, 판이 점점 키질 수밖에 없는데, 결국 더는 추가로 투자금을 모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피라미드는 자체의 무게로 붕괴하고 만다. 왜 이렇게 되는지는 다음의 방정식으로 간단하게 입증된다.



어떤 폰지 사기꾼에 2명의 최초 투자자가 걸려들었다. 이들에게 수익금을 지급하려면 4명의 새로운 투자자가 필요하다. 이들 모두에게 수익금을 배급하려면 8명이 더 필요하다. 그다음 투자자의 수는 16, 32, 64…로 늘어나야 한다. 이렇게 진행하는 수열은 등비수열의 일종이다. 이 공식으로 투자자를 구해보면 초기 투자자에서 20세대만 내려와도 투자자 수가 52만 4,288명이 필요하다. 이렇게 황당한 확장세가 전제조건이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날씬한 것이 아름다움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뚱뚱하면 왠지 느리고 게으른 사람으로까지 치부되기도 한다. 도대체 마른 것과 뚱뚱한 것을 나누는 기준이 뭘까? 이 기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BMI 공식이다. BMI 공식은 벨기에의 통계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인 아돌프 케틀레에 의해 1870년 처음 만들어졌다.



케틀레는 사람을 몸무게만 가지고는 적당한지 판단할 수 없어, 키를 반영한 공식을 고안했다. 개인의 체중을 신장의 제곱으로 나누면 개인별 키 차이가 나름 합리적으로 반영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BMI로 불리는 케틀레 지수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를 광범위하게 적용해 체중과 여타 인구통계학적 변수를 연계한 것들이 쏟아졌다. 체중과 소득의 관계, 체중과 교육 수준의 관계, 출생지별 체중 등등. BMI가 이렇게 남발될 만큼 정확한 것일까? 사실 케틀레의 BMI 공식에는 어떠한 이론적 근거도 없다. 단지 그저 그럴 듯한 비교치에 불과하다.


키가 약 1m 98cm에, 체중이 약 97.5kg인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의 BMI는 25쯤 된다. 이 수치는 정상과 과체중의 경계에 있다.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농구 황제로 불리는 사나이가 과체중이라는 뜻이다.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의 BMI는 26이다. 어김없는 과체중이다. 코트를 날쌔게 누비는 테니스 챔피언이 과체중이라는 말이다. 물론 같은 조건의 일반인이라면 과체중일 수 있다. BMI는 근육의 밀도를 잡아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BMI가 남발되고 있는 건 통계 자료를 통해 비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는 그만한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책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과학과 공학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비즈니스, 예술, 레포츠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52가지나 되는 신기한 수학 이야기들은 짤막짤막하다. 물론 52가지 방정식들 가운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생소한 것도 적지 않다. 책에 실린 방정식 가운데는 그 하나만을 위해 몇 권의 책 지면을 할애해야 할 만큼 대단한 것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책을 읽는 독자에게 순서를 지켜가며 읽으라고 하지 않는다. 읽고 싶은 순서대로, 설렁설렁 읽기를 강추한다. 우리는, 영국 물리학자 켈빈 경의 말처럼, e-x2dx의 마이너스 무한대에서 플러스 무한대까지의 적분이 파이의 제곱근과 같다는 것을 아는 수학자가 아니고, 2+2=4라는 것만 아는 일반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책이 어느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수학책이길 희망한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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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빚 체제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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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마법/리차드 디인스트 지음/권범철 번역/갈무리 펴냄

 

우선 저자가 말하는 빚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빚짐은 빚과 어떻게 다른가?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빚(debt)이 “셀 수 있”는 “좁은 경제적 개념”이라면 빚짐은 “현실의 빚[채무]들로 환원될 수 없는 책임과 사회적 귀속 그리고 상호 의존의 차원들을 나타”내는 “보다 넓은 존재론적 개념”이다. 즉 빚짐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들이 형성하는 다양한 협력적 관계들, 상호 유대들, 그리고 그 유대들이 가능하게 만드는 집합적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빚짐은 우리에게 자신의 그러한 생산적, 구성적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빚짐과 빚이 구분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빌려오면 “이 책은 현재의 빚[채무] 체제가 빚짐이라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차원을 포획하여 그것을 이윤의 동력으로 전환시킨다고 주장한다.”(310쪽)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건 빚짐의 상호 유대와 그것의 능력보다는, 채무 체제의 폭력적인 양상이다. 그런데 빚짐이 잘 드러나지 않고 경험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의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저자가 택하는 방식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채무 체제의 이면을 살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그러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 즉 주거, 보건, 교육과 같은 문제들을 사회적 유대를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빚을 내서 해결한다. 그러나 사실 그건 해결된 문제라기보다는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분명 채무 체제가 가진 억압적인 면이다.

 

 


그런데 우리가 빚을 통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어쨌든) 해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별반 소득도 없는 내가 만일 빚을 내서 집을 살 수 있다면, 그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이 채무 체제가 보여주는 “현대적 연대의 일종의 전도된 상(像)”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사회의 “총 빚[채무] 수준을, 체계 전체가 원하는 물질적, 상상적, 상징적 자원들로 현재의 힘들을 증대시키는 집합적 능력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인류가 협력하여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을 평가하는” “일종의 엑스레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100쪽)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쯤에서 우려를 표할지도 모른다. 빚을 내서 집을 사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더군다나 가계부채가 1,000조가 넘는 이 나라에서 그것이 경제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장황하게 설명하려 들지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빚을 내서 집을 사는 사람들의 무분별함을 근엄하게 꾸짖거나, 그러한 구매 행위는 결국 채권자에게 이용당하게 될 뿐이라고 충고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이 빚에 대한 기존의 담론들이 설파하는 내용들이다. 그 담론들은 빚의 팽창을 채권자의 사기라는 측면에서만 고찰한다. 그리고 타이른다. 갚지도 못할 빚을 져서는 안 된다고.

여기가, 저자가 기존의 담론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이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소비자 부채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비롯한 가계부채의 팽창은, 방대한 띠의 사람들이 금융 지상낙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시도가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290쪽) 현재 금융 지상낙원에 대한 권리는 오직 자본에게만 있다. 자본은 위로부터 부과되는 신용의 형태를 통해 집합화된 잠재적 부를 포획한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책임을 지지 않고 투자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소수를 위한 빚 없는 신용과 (선택의 여지없이 위험을 감수하는) 다수를 위한 신용 없는 빚이 존재한다.”(252쪽)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에게는 이상적인 코뮤니즘이다. 자본의 금고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샘을 누리지 못할 까닭은 무엇인가? 저자는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언급하는 사례를 가져와서 되묻는다. 여기 “72만 달러 가치의 주택에 대해 모기지를 취득한 연소득 1만 4천 달러의 캘리포니아 농장 노동자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주택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프리드먼처럼 콧방귀를 뀌는 대신,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왜 안 돼?’ 어떤 포괄적인 주택 정책도 없고, 신용 회로들이 가로지르는 명백한 불평등을 감안할 때, 왜 농장 노동자의 레버리지가 월스트리트에서 매일 일어나는 거래들보다 더 터무니없다는 것인가?”(291쪽) 빚짐은 그러한 콧방귀에 항의하는, 자본만이 누리는 금융 지상낙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봉기”(290쪽)다.


우리는 한때 사회적으로 제공되던 것들(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기는 하지만), 즉 앞서 말한 주거·보건·교육과 같은 것들이 빠르게 사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득도 늘어나지 않고(올해 최저임금 인상액은 370원이다) 복지제도 역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빚을 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빚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빚들이 표현하는, “정치적 요구들로 재구성될 수 있는,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들”(291쪽)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채무 체제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안은 물론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 필요들을 충족할 수 있는 더 나은 방안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저자는 불평등한 신용 체계와 억압적인 채무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두 가지 시도들을 검토하는 것으로 급진적 빚짐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첫째는 소액신용(microcredit)이다. 소액신용 기관은 소액 대출을 확장함으로써 개인들의 사회적 활력화를 이끌고 빈곤 가구를 최악의 상황에서 구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가난하게 만드는 지배적인 조건들을 바꾸지 않는 한에서만 그들을 결핍에서 구할 수 있다”(296쪽)는 점에서 문제로 남는다.

둘째는 희년(Jubilee)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희년은 성경에 따르면, “50년마다 선포되어야 하며, 모든 빚의 탕감, 원 소유주에 대한 주택의 ‘상환’과 토지의 반환, 노예와 종의 방면, 해당 연도 동안 노동의 중지를 요구한다.”(296쪽) 희년은 빚의 면제를 주장함으로써 “일련의 저항들을 결집할 수 있는 긴요한 급진적 요구를 제기”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적 가능성조차 타협될 수 있다.”(298쪽) 저자는 저개발 국가들의 빚 탕감을 주장했던 [희년 2000] 캠페인을 예로 든다. 빚은 실제 면제되긴 했지만, 그 대상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따른 국가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그 캠페인은 그 처방을 따르지 않는 국가들의 정치적 지위는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시도들에서 긍정적 요소를 뽑아낸다. 저자는 급진적 빚짐 정치의 가능성은 이 두 가지 시도들과 연관된 두 가지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소액신용의 유토피아가 어떻게 경제가 초월론적 권리들이나 신성한 의무들이 없는 보편적인 상호 간 의무로 세워질 수 있을지 상상한다면, 희년의 유토피아는 어떻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가 집합적 의지의 행동으로 폐기될 수 있는지 상상한다.”(305쪽)

빚짐의 정치는 이 두 가지 태도의 변증법적 종합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온다. “혁명의 목적은 … 모든 사람을 자유롭고 소외되지 않게 하면서 상호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306쪽) 그러니까 저자가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은 이 두 가지다.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채무 체제를 깨뜨리는 방법뿐 아니라 상호 의존하면서도 자유로운 사회적 유대로서의 빚을 구성하는 방법 또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로서의 빚이라는 관점에서 가계부채 문제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주거와 보건과 교육은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는 의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291쪽) 주거, 보건, 교육 같은 것은 삶에 필수적이지만 개인이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공통재에 무관심한 금융 체계의 계산에 위임되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들”이 계산에 맡겨져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모든 위기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보건의료 체계에서 생명보다 이윤이 앞설 때 나타나는 결과를 우리는 메르스를 통해 목격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거, 보건, 교육을 유대로서의 빚짐으로 전환할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또 “연금 제도” 역시 “노동 없는 삶을 대비하려는 집합적 시도들”이다. 그런데 자본과 권력은 점점 더 “돈이 고갈”되어 연금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살기 위해 기금이 필요한 사람들과 “[미적립] 채무를 줄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정치적 의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저자의 진단에 의하면 “지금까지는 후자 진영이 이기고” 있지만, “신용 체계가 불평등과 소비주의의 잘못된 선택을 가속하는 대신, 일종의 공적 사업으로 또는 더 낫게는 집합적 자립의 제도로 기능”하도록 하는 “급진적 역습”을 수행할 수 있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다.(291~292쪽)

빚의 이면에 ‘연대’가 있다면, 관건은 우리를 억압하는 빚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빚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요점은, 존재하게 될 빚이 공통재(the common good)의 최대한의 발전을 목표로 함으로써 각 개인의 최대한의 발전이 가능하도록 조직되고 구조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회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 ‘우리’ 모두는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지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강요된 결핍보다는 공유된 풍부함의 원리에 기반한 정치적 프로그램이다.”(7~8쪽)

저자는 빚에 대한 이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불평등과 빈곤, 부시와 오바마의 국가안보전략(NSS), 프라다 상점의 건축, 록스타 보노의 보도사진, 맑스가 들려준 동화 등이 그것이다. 얼핏 보면 이 주제들은 서로 간의 연관성이나 빚과의 연관성이 커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불평등과 빈곤이 어떻게 현재의 채무 체제를 통해 양산되고 유지되는지, 국가안보전략이 어떻게 막대한 빚을 요구하는지, 프라다 상점이 어떻게 특별한 종류의 빚을 부과하며, 국제 개발 활동가 보노가 어떻게 현재의 채무 체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지, 그리고 맑스의 동화 속 장난감들이 어떻게 이행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지 알려준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막대한 금융 의무들에 얽매여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에 따라 마땅히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금융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유대로서의 빚의 발명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이룰 우리란 누구인가에 대해. 어쩌면 세계 도처에서 들려오는 빚의 정치에 대한 소식들은 그러한 고민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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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의 흔적이 남아있는 풀꽃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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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윤옥 지음/인물과사상사 펴냄

 

우리 겨레는 오래전부터 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이용해왔다. 당연히 오랫동안 불러온 우리 고유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의 일환으로 우리 산야의 식물들이 채집하고 이름 붙이면서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식물의 호적이라 할 수 있는 학명에는 일본 학자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 큰개불알꽃, 며느리밑씻개, 도둑놈의갈고리, 좀개갓냉이 같은 저속한 이름은 일본 이름을 번역한 것이다. 심지어 번역조차 엉터리인 것이 많다. 광복 70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우리 풀꽃 이름은 아직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및 관련 기관은 이 문제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예전부터 써오던 이름은 바꾸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광복 100주년이 되어도 우리 풀꽃은 일본 말에 오염된 지저분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보고 우리의 풀꽃에 우리 이름을 붙여줘야 할 것이다.

우리 풀꽃은 어떻게 창씨개명되었나?

우리 풀꽃 중에는 큰개불알꽃, 며느리밑씻개, 도둑놈의갈고리, 좀개갓냉이처럼 쉽게 그 풀꽃의 이름이 연상되지도 않을뿐더러 저속하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이름이 많다. 이 이름들은 일본 말을 무책임하게 번역한 결과이다. 큰개불알꽃은 오이누노후구리(大犬の陰囊)라는 일본 이름을 번역한 것이다. 이 이름을 붙인 것은 일본의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다. 마키노는 큰개불알꽃의 열매가 개의 음낭(이누노후구리, 犬陰囊)을 닮았다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 중요한 것은 큰개불알꽃 열매에서 개의 음낭을 본 것 자체가 일본인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이 이 꽃에 이름을 붙였다면 전혀 다른 이름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며느리밑씻개는 마마코노시리누구이(繼子の尻拭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마마코노시리누구이는 ‘의붓자식의 밑씻개’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의붓자식’이 ‘며느리’로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의붓자식이 밉지만 한국에서는 며느리가 미운 것일까? 어쨌든 가시가 촘촘히 난 풀로 밑을 닦는다는 발상 자체가 불쾌하다. 일본 말에서 유래해 식물도감에 버젓이 올라 있는 며느리밑씻개는 이 땅의 며느리들을 욕보이는 이름이다.

 

 


그런가 하면 번역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엉터리 이름도 수두룩하다.

개망초의 일본 이름은 히메조온(姬女?)이다. 일본어 ‘히메(姬)’는 어리고 가냘프며 귀여운 것을 뜻하므로 애기망초나 각시망초로 옮기는 것이 적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히메’가 붙은 이름은 대부분 ‘각시’나 ‘애기’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개망초 등 일부 식물은 ‘히메’를 ‘개’로 번역해놓았다.


등대풀이라는 식물이 있다. ‘등대’ 풀이기 때문에 바닷가에 높게 선 등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식물을 바닥에 낮게 붙어서 피기 때문에, 등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등대풀의 유래는 『표준국어대사전』이 아니라 일본의 『어원유래사전』에 나와 있다. “등대풀의 등대는 옛날 집안의 조명 기구인 등명대를 말한다”는 것이다. 등대풀이라는 한글 이름이 처음 보이는 문헌은 『조선식물향명집』으로 ‘등대풀(Dungdaepul)’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일본 말의 등대가 등잔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고 번역한 것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부르고 있는 것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이름마저 없앤, 자존심을 버린 이름들이다.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식물을 채집, 조사하면서 그 가운데 상당수에 ‘조선’이나 ‘고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현재 조선이나 고려가 붙은 들꽃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식물 이름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조선이나 고려 등을 빼고 옮겼기 때문이다. 봄을 대표하는 꽃인 개나리의 일본 이름은 조센렌교(チョウセンレンギョ)다. 일본 말로 조선(朝鮮)을 뜻하는 조센(チョウセン)이 붙어 있으나, 번역자들은 ‘조선’ 대신 ‘개’를 붙여 개나리라고 이름 지었다. 개나리 외에도 개암나무, 개벚나무, 개비자나무 등이 ‘조선’이 ‘개’로 번역된 경우다. 저자는 최초로 식물의 한글 이름이 기록된 『조선식물향명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조사해 2,079종의 식물 중 99종에 달하는 식물 이름에서 ‘조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식민 지배의 흔적이 남아 있는 풀꽃 이름

금강초롱은 금강산 등 산지에서 자라는 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한반도 특산종이다. 하지만 금강초롱은 예전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의 이름을 붙인 화방초(花房草)라고 불렸다. 하나부사는 초대 일본 공사로, 일제의 조선 강점 발판을 마련했던 인물 중 하나다. 하나부사에 대한 기록은 『고종실록』에도 남아 있다. 하나부사는 한반도 자연을 착취하기 위해 각종 자원을 조사했으며, 그 과정에서 나카이 다케노신을 비롯한 일본 식물학자들을 지원했다. 금강초롱은 이제는 더 이상 화방초라 불리지 않지만 학명(Hanabusaya asiatica Nakai)에는 여전히 하나부사의 이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조선화관, 또는 평양지모라 불리는 사내초(寺內草)는 악명 높은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바쳐진 이름이다. 데라우치에 관한 기록은 『한민족독립운동사』에서도 볼 수 있다. 데라우치는 헌병 주체 경찰을 편성해 한일병탄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완용에게 병탄 안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런 “데라우치 각하의 공을 길이 보존코자” 붙인 이름이 바로 사내초다. 사내초는 현재 조선화관이나 평양지모로 불리고 있지만, 학명은 여전히 데라우치 총독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식물의 호적이라 할 수 있는 학명에 남은 일제 잔재도 심각하다. 국립생물자원관에서 만든『한반도 고유종 총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한반도 고유 식물은 모두 33목 78과 527종이다. 이 가운데 일본 학자 이름으로 학명이 등록된 식물은 모두 327종으로 무려 62퍼센트에 달한다. 이제 와서 학명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우리 풀꽃의 호적이 일본인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알아두어야 한다.

아름다운 우리 이름을 돌려주자

일제의 식민 침략은 단순한 영토 침략을 넘어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우리 고유의 이름마저도 창씨개명으로 없애버렸다. 그런 와중에 우리 땅에 나고 자라던 수많은 풀·꽃·나무도 제 이름을 잃고 일본 이름으로 굳어졌다. 잘못된 번역도 많지만 번역을 바로 잡는 것보다 좋은 것은 일본인이 붙인 이름을 고집하지 말고 우리 정서에 맞는 이름으로 바꿔나가는 것이다.

풀꽃 이름뿐 아니라 풀꽃을 설명하는 국어사전이나 식물도감의 설명도 바뀌어야 한다.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해온 식물들에 관한 풀이가 어른도 이해하기 힘든 말로 경직되어 있는 것은 청산되지 못한 일본 말 찌꺼기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광복 7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아름다운 우리 풀꽃 이름에 붙은 일본 말 찌꺼기는 지금껏 대대적인 수술 한 번 없이 여기까지 왔다. 내로라하는 식물학자 가운데는 예전에 부르던 이름을 조금도 바꾸면 안 된다는 사람이 있으니 개탄스럽다.

저자는 국립국어원, 산림청, 국립생물자원관 같은 기관이 유기적으로 대처해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풀꽃 이름을 대대적으로 정리할 것을 촉구한다. 식물 이름을 모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제의 흔적이 강하게 남은 것들에 대해서는 유래라도 밝혀주는 것이 광복 70주년을 맞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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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만들어낸 세계,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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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포의 유토피아 기행/엘포 지음/우현주 옮김/서해문집 펴냄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2009년, 이탈리아의 만화가 엘포(본명 잔카를로 아스카리)는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를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다. 무한경쟁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1880년대 라파르그의 글은 마치 지금 이 시대를 위한 것만 같았고, 이에 영감을 얻은 그는 인류 역사상 더 나은 미래, 즉 유토피아를 꿈꿨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엘포의 관점은 이제까지의 유토피아 이야기와는 그 결이 다르다. 플라톤의 《국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비롯한 유토피아 소설들, 20세기 공산주의 국가들의 ‘이상으로서의 유토피아’가 기존의 유토피아 담론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엘포는 낙원, 자유주의, 정보 기술의 공유, 환경 보호 등 인간의 좀더 근본적이면서도 다양한 욕망이 만들어낸 유토피아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는 다시 구성한 유토피아의 역사를 자신이 14년 동안 만화를 기고했던 [디아리오]지에 연재했고, 그 단편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엘포의 유토피아 기행》은 진보를 꿈꾼 한 만화가가 더 넓은 관점에서 유토피아를 재조망하고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를 찾아보려 한 인문학적 그래픽노블이다.

 

 


엘포가 새롭게 제시하는 인류의 유토피아 여행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다. 여행의 주인공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이들은 먼저 모세가 사람들을 인도했던 약속의 땅과 코카인 나라로 향한다. 굶주림을 해결하는 게 가장 큰 과제였던 이 시대 유토피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 즉 ‘배고픔이 없는 낙원’이었다.

15세기에 이르면 ‘유토피아’(utopia, 그리스어로 ou-topos[없는 장소]와 eu-topos[행복한 장소]를 조합하여 만든 말)라는 말의 어원이 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섬에 다다른다. 이어 라블레의 텔렘 수도원,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다니엘 디포의 리베르탈리아를 여행한다. 왕과 귀족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횡포가 심했던 이 시대 유토피아의 모습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 사회’였다.

19세기 들어 유토피아는 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현실에서 실험에 옮겨진다. 샤를 푸리에가 제시했던 팔랑스테르에서 영감을 얻은 뉴욕의 사회주의 공동체 실험, 파리코뮌과 누아지엘 초콜릿 공장, 체칠리아 공동체 등이 그것이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유토피아의 모습은 다양해진다. 엄격한 프로테스탄트적 생활방식과 평화를 외치며 세계대전 참전을 거부했던 아미시(Amish) 공동체, 지중해 지역에 제방을 쌓아 유럽 국가들을 연결시키고 평화적 관계를 구축하려 했던 건축가 헬만 죄르겔의 아틀란트로파 프로젝트,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랑의 여름’ 축제를 열였던 히피들, 빵을 구워 팔며 길거리에서 대형 인형극을 통해 반전·환경운동을 펼쳤던 브레드 앤 퍼펫 시어터(Bread & Puppet Theatre), 급기야 바다 한가운데에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워버린 장미섬 공화국, 무료 전화망을 만들어 대중에게 ‘전화할 자유’를 허한 존 드래퍼, 1973년 뉴욕·런던·코펜하겐·밀라노 등 도시의 버려진 땅에 ‘씨앗 폭탄’ 테러를 벌여 꽃과 나무를 가꾸었던 게릴라 가드닝……. 평화와 협력, 반전, 환경 보호, 자유 등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현대이기에 유토피아의 모습도 그만큼 다채롭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드디어 유토피아에 도착한다.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반짝이는 사막 한가운데,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유토피아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려는 두 사람을 문지기가 막아선다. “너희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자들인가? 무엇을 가져왔는가?” 성심껏 대답을 했건만, 돌아오는 건 문지기의 똑같은 물음이다. 하염없이 되풀이되는 문지기의 동문서답. 유토피아를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한다. 왜?

신이 선물한 에덴동산과 약속의 땅을 제외하고는 엘포가 소개한 유토피아에 거저 들어간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그곳을 ‘만들어낸’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인류는 원하는 바를 상상하고 글로 표현하고 실천에 옮겨왔다. 결국 모두 실패에 그쳤지만, 현실은 변화했다. 대다수의 인류가 굶주림에서 벗어났고 계급이 사라졌다. 전쟁과 환경 파괴는 분명히 막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유토피아 담론에는 이렇듯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다.

모두가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 그 욕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퇴색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현실이 개선되기를 원한다. 공동육아, 대안학교 등 대안적 삶을 찾는 최근의 움직임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필요한 건 오직 우리의 보다 적극적인 행동뿐인지도 모른다. 엘포 역시 서문에서 이 같은 이야기로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자유주의냐, 아니면 신자유주의냐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향연(饗宴)이 아니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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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전쟁? 국가의 잔인한 변명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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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1936, 이탈리아)

 

터키 휴양지 보드룸 해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시리아 난민 관련 뉴스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게다가 그 난민이 세 살배기 아이였다는 사실은 전쟁의 참상을 그 무엇보다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또 한 명의 시리아 난민이 전세계인들을 향해 전쟁에 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호소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켈레티 역에서 독일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열 세살의 시리아 난민 키난 마살메흐군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난민 신세로 세르비아, 헝가리, 마케도니아, 그리스를 전전하며 받았던 차별을 언급하며 시리아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이어 키난 마살메흐군은 세계인들을 향해 전쟁을 멈추게 해주세요.라는 짧지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덧붙였다고 한다.

 

모든 전쟁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참혹한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탐욕스런 국가의 악랄한 변명일 뿐이다. 지금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전쟁들도 평화라는 명분과 달리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처참함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은 소위 국민또는 시민이라 부르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마저 상실한 채 오직 국가만이 존재할 뿐이다.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전쟁>은 이런 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사진>구글 검색

 

외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게 된 여인과 남편이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기차를 탄다. 부부는 자신들의 슬픔을 다른 승객들에게 이야기하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만 이야기할 뿐 이 부부에게는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한다. 특히 부부의 슬픔을 가장 냉철하게 분석하는 뚱뚱한 남자의 등장은 작가의 전쟁에 관한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스무 살이 된 아이들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는 걸까요?중략국가가 존재하고 또 그 국가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먹는 빵처럼 꼭 필요한 것이라면, 누군가가 그것을 지키러 가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스무 살이면 갑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눈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죽더라도 열정적으로 행복하게 죽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우리는 모두 울음을 그쳐야 합니다. 모두 웃어야 합니다. 저처럼 말입니다.-<전쟁> 중에서-

 

뚱뚱한 남자는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은 행복하고 후회 없는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절대 슬퍼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최고의 방식으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므로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인공 여인 뿐만 아니라 기차 안의 모든 승객들은 아들의 죽음에 저토록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감한 아버지를 치하한다. 전쟁터에서 죽은 자식의 죽음을 이렇게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뚱뚱한 남자의 이 냉철함도 사실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현실적인 상황 앞에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아들이 정말로 죽었냐는 여인의 질문에 뚱뚱한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결국 전쟁이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의 아니 국가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뒤에 남는 것은 슬픔과 상처라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수많은 양심적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아베 정권은 군국화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양이다. 물론 아베 정권의 변명은 전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저 국가의 잔인한 변명일 뿐 세상에 평화를 위한 전쟁이나 군사적 재무장은 없다. 얼마 전 비무장지대 지뢰폭발사건을 두고 남북이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도 남과 북의 정부와 언론은 경쟁적으로 군대 자원이나 전역 연기 사례들을 보도함으로써 전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마치 평화를 이야기하면 비겁한 국민이 되는 것처럼. 중국의 손자도 말했다. 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평화적인 노력보다는 평화를 명분으로 쉬 전쟁을 이야기하는 사회 분위기가 못내 아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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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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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네사 캐리 지음/이충호 옮김/해나무 펴냄

 

“DNA는 대본에 가깝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생각해보라. 1936년에 조지 큐커 감독은 이 작품을 레슬리 하워드와 노마 시어러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만들었다. 60년 뒤에 배즈 루어먼 감독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를 만들었다. 둘 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기본 대본으로 삼았지만, 두 영화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시작은 같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세포가 DNA에 들어 있는 유전 암호를 읽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같은 대본을 사용하더라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_본문 중에서

할아버지의 식습관이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산모의 영양 상태가 태아에 장기적 영향을 미친다면? 후성유전학자 네사 캐리의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원제 : The Epigenetics Revolution)는 DNA의 운명이 ‘사용법’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소개해주는 후성유전학 입문서이다. 음식이나 화학물질, 아동 학대 등으로, 잠들어야 할 유전자가 깨거나, 깨어 있어야 할 유전자가 잠들거나 하는 생명현상을 하나 가득 소개해준다. DNA의 염기 서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을 최신 후성유전학 연구 결과에 기대어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특징이다. 후성유전학이란, 환경에 따라 유전자가 발현되거나(스위치가 켜지거나) 발현되지 않거나(스위치가 꺼지거나) 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연구하는 유전학의 하위학문이다.

 

 

 


후성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임신초기 석 달 동안 산모가 영양실조에 시달리면 아이가 비만아가 될 확률이 높고, 할아버지가 소년일 때 비만아였다면 그의 손자가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높으며, 어린 시절 학대를 경험한 어른은 자살할 확률이 보통 사람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현상은 DNA 염기 서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DNA에 돌연변이가 생겨서 나타난 결과가 아니다. 즉 아이의 DNA 염기 서열에는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도 뱃속에서의 초기 경험이 수십 년간 아이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는 유전정보가 아닌 무엇인가가 유전자의 스위치 위치(ON/OFF)를 거꾸로 돌려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 화학 물질과 오염 물질, 자외선 등 수많은 환경 자극과 경험은 유전자가 발현하는 방식에 극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잠재적 요인이다. 물론 환경과 경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후성유전적 변형’을 본성(유전정보)과 양육(환경)을 잇는 ‘잃어버린 고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후성유전적 현상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이는 DNA에 메틸기가 달라붙거나(DNA 메틸화), DNA가 감겨 있는 히스톤 단백질에 변형이 생기거나(히스톤 변형) 하는 현상과 관련이 깊다. 부모로부터 멀쩡한 DNA를 물려받더라도, 환경 등의 영향으로 DNA에 메틸기가 달라붙거나 히스톤 단백질에 변형이 일어나면, 유전자가 발현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침묵하거나 침묵해야 할 유전자가 발현될 수가 있다. 유전자가 발현되어야 할 상황에 발현되지 않거나, 발현되지 않아야 될 상황에 발현되면 몸에 문제가 쌓일 수밖에 없다.

DNA에 메틸기가 달라붙거나 히스톤 단백질에 변형이 생기면, 유전자 발현에 변화가 일어나 세포의 기능뿐 아니라 세포 자체가 변할 수 있다. 켜져야 할 유전자가 꺼지거나, 꺼져야 할 유전자가 켜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심지어 세대를 넘어 자식에게 유전되기도 한다. 가령, 임신 초기에 임산부가 영양실조에 시달리면, 태아의 세포들은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키고, 이 패턴은 수십 년간 고정될 수 있다. 이 아이들의 세포는 제한된 영향 공급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후성유전적으로 프로그램밍되어 비만아가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일은 DNA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고도, DNA 메틸화 혹은 히스톤 변형만으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극단적인 예로, 네덜란드 대기근(1944~1945)에 살아남은 생존자를 조사해본 결과, 임신 초기의 석 달 동안 굶주렸던 산모의 아이들에게서 평균 아이보다 비만율이 더 높게 나타났고,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비율도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생쥐 실험을 예로 들면, 수컷 흰쥐에게 고지방 먹이를 실컷 먹여 과체중으로 만든 후 정상 체중의 암컷과 짝짓기를 시키면, 그 새끼들에게서 당뇨병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적어도 설치류에서는, 아비의 영양 섭취가 자식의 유전자 발현과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는, 대부분 거의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는데도, 50대 이후가 되면 DNA 메틸화와 히스톤 변형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성유전적 차이가 일란성 쌍둥이의 차이를 빚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면 후성유전학은 어린 시절의 학대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연구 결과,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를 겪은 어른들에게서는 스트레스에 민감한 코르티솔의 평균 생산량이 정상인에 비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뇌에서 유전자 발현에 변화를 초래했고, 이것이 계속 유지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렇게 코르티솔의 양이 많은 상황은, 마치 여름철에 겨울철 보일러와 방열기가 계속 작동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우리 유전자가 자신이 부계에서 기원했는지 모계에서 기원했는지를 기억한다거나(각인), 여성의 X염색체 중 하나는 모든 세포에서 무작위적으로 비활성화된다거나, 특정 종류의 miRNA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면 암이 생긴다거나 하는, 후성유전적 변형과 관련이 깊은 흥미로운 현상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왜 정자 1개와 난자 1개가 합쳐져야만 아기를 만들 수 있는지, 클로닝(동물 복제)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왜 일부 식물은 개화하기 전에 반드시 추운 시기를 겪어야 하는지, 유전자가 같은데도 여왕벌과 일벌의 형태와 기능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얼룩고양이는 왜 모두 암컷인지 등 궁금증을 일으키는 후성유전적 사례도 함께 접할 수 있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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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가 남성지배사회라고? 남성도 착취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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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되는 남자/로이 바우마이스터 지음/서은국, 신지은, 이화령 옮김/시네마북스 펴냄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똑똑한 것도 아니고, 여성에 대한 사악한 음모자들도 아니다. 남녀의 차이는 기본적인 호불호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남녀 차이는 남성이 다른 남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이 남성들의 관계방식이 여성들간에 이루어지는 관계방식과 어떻게 다른지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남녀 차이는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련된 것이다. 남성들이 갖게 된 우연적 요소로 인해 문화는 여성보다는 남성들의 관계모형을 근간으로 발전되었다. 이 책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잘하는 일은 무엇이고, 문화가 왜 이러한 일들을 남성에게 맡기고 해당 일들에 있어서 남성들을 착취하는지에 대해 여러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도 감히 남성이 어떤 면에서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여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최근에 출판된 그의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많은 원칙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 책『소모되는 남자』에서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현대의 남성성과 관련된 많은 질문들에 도발적인 답변들을 제시한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적대적이기보다는 협동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고, 성공한 문화들은 다른 경쟁문화를 능가하기 위해 이런 남녀차를 더욱 부각시켜왔다고 주장한다. 다른 모든 종들과 마찬가지로, 인류 조상들도 알파메일(alpha male)로 불리는 우두머리 수컷들만이 번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성의 진화적 전략이 여성에 비해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공격과 보호행동을 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선호하고 이런 관계방식에 뛰어난 반면, 남성들은 서로 경쟁하고 문화건설의 기반을 이루는 더 큰 기관들과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문화는 남성의 역할을 성취하고 생산하며, 다른 이들을 부양하고, 필요하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강요함으로써, 결국 남성을 착취한다. 저자는 남성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로부터 상당한 이점을 얻는다는 점과 동시에, 그로 인해 그들이 얼마나 고통 받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남성들은 비즈니스와 정치의 상위계층을 지배한다. 하지만 여성보다 훨씬 많은 수의 남성들이 직무도중 사고로 죽고, 투옥되며, 전투에서 사망한다. 이는 현재 젠더관련 논의들에서 거의 대부분 놓치고 있는 사실들이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착취당하고 희생양이 되었다. 불운했던 여성들의 삶이 사회로 인해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남성 또한 착취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가 여성이 사회에서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보는 것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점 때문에 여성의 반대편인 남성의 입장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문화적 착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소모되는 남자』는 뛰어난 논리 전개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근거들을 바탕으로 남성과 여성의 젠더 관계에 대한 새롭고 보다 균형 있는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남녀차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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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을 되찾아 지키는 것의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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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마블스, 조각난 문화유산/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김영배·안희정 옮김/시대의창 펴냄

 

2012년 설립되어 문화재 환수를 전담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201510월 현재, 국외에 소재한 우리 문화재 현황은 총 20개국에 걸쳐 16342점에 이른다. 그중에는 약탈당한 것도 있고 공식/비공식 절차를 통해 매매된 것도 있다. 일본이 67,708점으로 전체의 42%를 갖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1,400여 점을 반환받은 이후 되돌려받은 국보급 문화재는 2006조선왕조실록2011조선왕실의궤등에 불과하다. 20115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부터 반환받은 직지는 해당 국가에 있지 않은데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유일한 예라고 한다. 영국 왕립박물관에 있는 세종대왕 측우기, 일본 덴리(天理) 대학 중앙도서관에 있는 몽유도원도, 일본 어딘가에 있을 다보탑 돌사자3, 도쿄박물관에서 용도를 몰라 뒤집힌 채 보관되었던 금산사향로등 아직 우리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문화재가 너무 많다.

 
201575일 일본의 하시마 섬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일본 근대산업을 일군 하시마 섬의 탄광에는 산업 역군으로 참여한 일본인 말고도 조선인 다수가 강제 징용되어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그런 까닭에 지옥섬으로 불렸다. 그런데 등재 이유에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등재 취소움직임이 이는 등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 것은 두 달여가 지나 TV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생존자의 입을 통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이렇듯 문화재와 문화유산에 대한 왜곡도 심각한 상황이다.

 

 


<파르테논 마블스, 조각난 문화유산>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 어떻게 쪼개져 그리스와 영국 두 나라서 보관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리스가 요청하는데도 왜 오랫동안 반환되지 않는지의 전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먼저 인류가 파르테논에 저지른 만행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역사 속의 파르테논]), 보존이라는 미명에 숨겨진 인간의 탐욕으로 이루어진 약탈과 훼손 과정을 연대기순으로 훑어본다. 그리고 영국으로 대표되는 반환하지 않으려는 입장과 그에 대한 변명, 이에 맞서 인류 유산을 온전히 지키려는 그리스의 입장을 논쟁 중심으로 탐사한다([엘긴 마블스]). 마지막으로 현재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에서 4대 신전이 복원되고 있는 과정([아크로폴리스 유적 복원 사업])도 다룬다.


저자들은 모두 일관되게 파르테논의 반환과 환수, 보수, 재결합 과정이 필요한 데는 윤리적, 법적, 미학적, 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역사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긴박하고 촘촘하다. 대표 저자 히친스가 인용한 여러 서신, 회의록, 문학 작품과 그의 해설을 쫓다보면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한눈에 그려진다. 때로는 저자와 함께 분노하고 때로는 저자처럼 냉철하게 이 책의 주제에 다가갈 수 있다. 이로써 문화와 문화유산이란 무엇이며, 이것들을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어판에는 이미지 70여 컷을 추가했다.

2500년 전, 민주주의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 페리클레스와 천재 조각가 페이디아스에 의해 건설된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 파르테논. 3세기경의 대화재로 내부 일부가 손실되었고, 그 뒤 기독교 교회, 아테네 그리스정교회의 대성당, 가톨릭교회, 이슬람 모스크로 쓰이며 건축 요소가 추가되거나 뜯겼다. 모리시니가 주둔한 동안 포격으로 지붕이 날아가고 나치의 신질서를 상징하는 만자 깃발이 펄럭이는 등 신성모독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신전을 가장 심각하게 약탈하고 훼손한 사람은 투르크 주재 영국 대사 엘긴이다. 그는 대리석 조각 일부를 톱으로 잘라 영국으로 가져가 빚을 갚기 위해 정부에 팔았고 그 조각들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는 파르테논 절반에 해당한다.

엘긴이 투르크 술탄으로부터 받은 칙령은 “‘우상들의 성전현장에서 조각의 모형을 뜨고, 스케치를 할 수 있고, 신전 주변에서 파편을 발굴할 수 있고, 글자나 형상이 새겨진 돌 조각을 떼어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60)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엘긴이 고용한 루시에리는 본뜨고 스케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20년간 조각을 뜯어내 영국으로 날랐다. 톱으로 대리석을 뜯어내다 두 토막을 내기도 하고, 나르기 너무 큰 조각은 일부러 잘라냈다. 조각을 싣고 영국으로 향하던 멘토르호가 바다로 침몰해 일부 조각을 영원히 잃었다. 이 대리석 조각들로 집을 꾸미려던 엘긴은 파산해 영국 재무부와 흥정을 시작했다. 과연 칙령은 정확히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 엘긴은 대사의 특권과 지위를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는가, 정말 이 일에 62,440파운드나 들었는가, 영국 정부는 얼마에 구입하는 게 합당한가진짜 주인은 따로 있는데 도굴꾼과 장물아비의 흥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존과 반환의 입장은 역사적으로 날선 공방을 펼쳐왔다. 보존을 주장하는 입장은 현대의 그리스인은 진짜 그리스인이 아니며, 대기오염이 심하고 보존 능력이 떨어지는 그리스보다 영국이 더 안전하고 온전히 보존할 수 있고, 파르테논 조각을 반환하면 영국의 박물관과 갤러리가 텅 빌 것이므로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는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반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에 맞선 반환 입장은 파르테논이 곧 그리스이며, 그리스의 것이므로 파르테논은 그리스에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표 저자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파르테논을 둘러싸고 벌어진, 의회를 포함한 영국 내 논쟁의 역사에서 그리스에 반환하자는 주장은 일관되었던 반면, 영국에 보유하자는 주장은 그때그때 다른 논거를 늘어놓으며 일관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대략 6가지로 압축된 명제의 몇 가지 또는 전부를 돌아가며 썼다는 것이다(189~190). 이에 대해 네이딘 고디머는 [서문]에서 음침한 변명이라고 일축했다(21). 히친스는 영국의 바이런, 토머스 하디, 존 키츠,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인용해 이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복원한다.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보유하고 있으니 우리 것이라는 쩨쩨한 고집을 버릴 수 있는 길은 법령 하나만들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문화유산을 환수하고 복원하는 일은 단지 유형의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을 보유한 인류의 에토스와 역사, 종교, 신화, 도덕성, 국민성을 복원하는 일이다. 문화유산을 되찾아 지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볼 시점이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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